호정, 브루노전 [Broken Whole]

2017.3.1-3.14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22만명이 넘는 한국 아이들이 국외로 입양이 되었다. 그 중 상당 수가 유럽과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부모가 생존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고아의 정의에 부합하지는 않았으나 혼혈이라는 이유로, 혹은 미혼모의 자녀라는 이유로 버려져 입양이 결정되었다. 나 역시 그런 아이 중 하나였으며……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
자라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입양 된 것을 천운으로 알고 감사해야 한단 소리를 듣곤 했다. 나는 절제된 가면 뒤에 숨어 불편한 기색이나 고통스런 감정들을 묻는 방법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아시아인으로 느껴졌던 적도 없었으며 끝까지 그 사실을 외면하고자 했지만, 아시아인의 얼굴에 갇혀 배신 당한 기분이었다.
2014년 12월 29일, 나는 생모를 만났다. 그 경험은 말그대로 아찔하고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의 생모는 뇌졸중으로 왼쪽 신체가 마비된 상태였으며 말도 할 수 없는 상태로 1998년부터 요양 병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내 과거의 빈틈을 채우고 생모의 이야기, 또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던 나의 기대와 계획은 어머니가 소통 불가 상태였기에 모두 수포로 돌아간 듯 보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을 들여다보자 나는 즉각적으로 그녀가 나를 알아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울며 나는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무언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내 어머니에 동화되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꼼짝할 수 없었고 내면 깊은 곳에서 길을 잃은 채 나는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내가 어떤 기분인지도 설명할 수도 없었다. 멍하고 공허했다. 살아 있음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졌다. 한없이 잠에 빠져 있고 싶었고,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브루노는 이런 내 상태를 하릴없이 묵묵히 지켜봤다. 나를 추스려 내가 일어나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돕고자 했다. 그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내가 내 자신을 표현하길 촉구했다. 브루노와 함께 작업하며 이런 작품들을 창조해 낸 것이 내가 내 목소리를 다시 얻게 된 과정의 일부였다. 한국인 입양아로 살며 느끼고 경험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통해 외부적 상황, 환경 그리고 인식이 내 내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표출했다. 내 정체성의 완성도를 찾기 위해 겪어야 했던 내면의 투쟁을 드러냈고, 또 어쩌면 한 사람의 의식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복잡함 속에서 작은 평화를 찾고자 했다.

~ 호정 아우덴에르네


작가노트]
1953년 한국전쟁이 중지된 이후부터 22만 여 명의 남한 아동들이 전세계 - 주로 유럽과 미국으로 입양되어 나갔다. 그중 다수는 아직 부모님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고아가 아니었다. 이 아이들은 보통 혼혈이나, 미혼모의 아이라는 이유에 의해 버려지거나 입양을 위해 부모가 양육권을 포기한 아이들이다. 이는 나의 이야기이다.

아무도 내게 내가 입양아라고 말해줄 필요가 없었다. 나는 큰 키에 파란 눈을 가진 부모님이나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매우 다르게 생겼다. 끝없는 질문들이 닥쳐왔다. 어디에서 왔니? 왜 다르게 생겼니? 너의 ‘진짜’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니? 무엇 하나 쉽고 편한 답이 없는 수많은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모두 그러하듯이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행복하고 싶었다.

자라면서는 종종 입양된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금욕적인 가면 뒤에 불편한 감정이나 고통을 빠르게 묻고 감추는 법을 익혔다. 스스로 전혀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나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아시아인의 겉모습은 마치 덫에 걸린 느낌으로 배신감마저 들었다.
어느 날, 산산조각이 난 나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 라는 절대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브루노의 응원과 도움을 받아 나는 기억 하나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지만 영원히 나와 연결되어 있을 나라, 남한으로 오게 되었다. 나는 내 삶의 첫 번째 27개월을 보낸 고향에서 나의 뿌리와 가족의 역사, 그리고 대답을 찾으려는 것이다.
2014년 12월 29일, 나는 내 생모를 만났다. 이 경험은 문자 그대로 느닷없이 당했고 날 쓰러지게 했다.
1998년부터 요양병원에 있었던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내가 기대해왔었던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이야기나 어머니의 이야기,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어머니의 안에 갇혀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을 바라보자, 그녀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을 붙잡고 함께 우는 동안 나의 마음 속 깊숙한 곳에 있던 무언가가 깨졌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나의 어머니로 바꾸었다. 나는 얼어붙고 움직일 수가 없었으며 깊숙한 곳의 무언가를 잃어버렸지만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에 내가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 설명할 말도 없었다. 나는 무감각해지고 텅 비었다. 삶은 고통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브루노는 이 모든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았다. 그는 나를 달래어 일어나 다시 살아가도록 노력했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 자신을 표현하도록 나를 설득했다. 브루노와 함께 한 이 작업들은 목소리를 다시 찾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한국인 입양아로서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외부적 환경과 상황, 인식이 나의 내적 세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내며, 내 정체성의 전부를 탐험하며 내 내적인 갈등을 드러냄과 동시에 아마도 한 인간객체로서 살아간다는 것이란, 지각한다는 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복잡성 속에서 평화를 찾아가는 것이다.이 프로젝트는 목소리가 사라져버린 나의 생모에게, 또한 남한의 모든 미혼모들에게 바친다. 그들은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아무 지원을 받지 못하고 더 나은 삶과 미래를 주고 싶다는 희망으로 아이들을 포기하는 매우 용기있고 가슴 아픈 결정을 내렸다.
- Hojung Audenaerde




visibleINvisible은 Hojung Audenaerde와 Bruno Figueras의 창작 2인조이다.
Hojung Audenaerde는 한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의 벨기에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었다. 미국 유목민같은 가정에서 자랐으며 현재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거주중이다.
16세에 정체성에 혼란을 겪으며 존재의 의미와 진정한 자유와 같은 영적인 의문을 가지면서 접한 요가와 불교를 통해 세계 여러 곳을 다니게 되었다. 그녀의 일생은 그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자각, 더 나아가 작품의 뒤에서 영감을 주는 힘에 깊이 영향을 주었다. 그는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것에 대해, 한 사람이 외부적으로 인지되는 것과 내부적으로 느끼는 것의 괴리에 대해 깊이 매료되어 있다. 창작의 과정을 통해, 그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비물질, 인간경험의 취약성과 투명성 사이의 경계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다.
Bruno Figueras는 바르셀로나의 사진가로 카메라를 들고 세계를 헤매고 있다. 그는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낯선 현실을 통해 진실을 찾으려 노력한다. 그가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은,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가 바로 그의 앞, 집안에 있다는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호정의 절망을 통해 맞닥뜨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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