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임, 달항아리,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_ 시대의 눈 : 해석된 달항아리
이시대 작가들이 재해석한,
각각의 심미안이 담긴 달항아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살펴 보는 전시
참여작가 : 권현진, 김덕용, 도상봉, 승지민, 아트놈, 이상협, 이용순, 이이남, 이종기, 정현숙, 챨스장, 최영욱, 하태임 총 13인
1300도 가마에서 일어나는 때와 불의 조화,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이라 불리우는 이조백자 달항아리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오늘날의 수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고 한국적 조형미의 극치로 평가받고 그 있다. 그 달항아리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의 심미안은 달항아리로 시작되었다”는 김환기화백은 그것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한국의 산천과 달, 매화, 여인들을 함께 그렸다. 그 이후 달항아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고 수많은 미술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더운 여름 한 줄기 소나기를 내리고 저쪽 하늘에 다시 피어오른 눈 같은 뭉게구름과 큰 바다와 호수와 강가 겨울산과 바람을 생각하기도 한다.”고 정양모 관장이 표현했던 백자대호 달항아리, 소박한 어깨에 당당한 굽, 둥근 팔각에서 오는 편안함, 거기에 풍만함과 준수함은 어떤 것도 품을 수 있는 군자의 마음을 지녔고, 시작 끝의 개념을 모두 함축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달항아리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체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장 평범하고 단순한, 기교를 부리지 않은 비정형의 형태가 품은 너그러움과 넉넉함이 한국민의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다.
둥근 형태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에너지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달항아리. 한국적 아름다움의 정수 달항아리, 이에 대한 현대적 시선을 가진 작가들은 달항아리를 어떻게 해석할까? 갤러리나우는 현재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작가들이 해석한 달항아리에 대한 시선을 살펴 보는 전시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 _ 시대의 눈 : 해석된 달항아리>展을 마련했다.
갤러리나우는 2020, 2021년 2회에 걸쳐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전을 열어서 많은 관심을 받은 바 있다. (참여작가 : 강익중, 고영훈, 구본창, 김덕용, 김용진, 석철주, 최영욱, 신철, 김판기, 이용순, 오만철. 전병현... )
2022 세번째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 _ 시대의 눈: 해석된 달항아리>展은 이 시대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작가들이 달항아리를 각각의 심미안으로 재해석한 작업들을 보여준다. 권현진, 김덕용, 아트놈, 이상협, 이용순, 이이남, 이종기, 정현숙, 챨스장, 최영욱, 하태임등 작가들에 의해 박물관에서 문화재로 있던 그 달항아리는 이 시대의 아티스트의 시선을 통해서 시대적이 해석이 더해져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재탄생 되는 자리이다. 아울러 자신의 호를 도천(陶泉·‘도자기의 샘’이라는 뜻)으로 지을 만큼 도자기를 사랑했던 도상봉(1902~1977)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권현진, VISUAL POETRY X MOON JAR, 76x76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권현진, VISUAL POETRY X MOON JAR, 76x76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권현진, VISUAL POETRY X MOON JAR, 76x76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이미지 탐험의 새 지평 : 보이지 않는 것의 가시화
미술학 박사 권현진
1-1. 요약
지난 세기의 중심 과제였던 근대주의에 의한 미술은 21세기를 맞아 재사유를 필요로 한다. 이전 세기의 미술에서 가령 추상화란 지각 가능한 자연 이미지를 제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환영을 배제한 2차원 평면으로 환원코자 했다는 데 뜻이 있다. 예컨대 몬드리앙은 보이는 자연의 외관을 수평수직의 형식으로, 그리고 말레비치는 플라톤적 절대형태로 각각 환원하였다.
이제 이러한 의미의 환원주의 미술은 그 기반 자체를 재고해야 할 때다. 21세기 미술은 재현과 서술, 그리고 환영을 지우고 비워나가는 20세기 패러다임의 연장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미술은 우리시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주창하는 시간과 공간의 여분차원(extra dimension)으로 눈을 돌려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향에서 재고해야 한다. 그 방향은 추상회화의 원조인 칸딘스키와 몽드리앙 그리고 뉴욕 추상표현주의가 지향했던 가시적인 자연을 개념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것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방향에서 해법(지표)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분으로 존재하는 불가시적 세계의 이미지를 가시세계의 것으로 불러들여 이것들을 현존세계의 이미지와 융합함으로써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장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보이는 세계의 시⋅공간의 해체는 물론 재구축을 빌려 존재 가능한 세계의 이미지를 적극 창출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21세기 미술이 다루어야 할 이미지란 추상과 구상의 구분을 초극해서 종래의 본질이나 형식 같은 관념적 요소로부터 이미지는 해방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창발될 가상이 이미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1-2. 아이디어 면
나의 근작들은 이전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들에서 형식을 추출하는 의미에서의 추상이미지를 다루지 않는다. 자연의 내용들을 비워가는 추상화가 아니라 그 역의 맥락에서 용합과 혼성에 의한 추상이미지를 다룬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빛을 봤을 때 안구에 맺히는 가상의 환영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내려는 데서 시작한다. 이는 과거의 추상적 사고를 역으로 추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를 빌려 끝없는 구축과 해체, 재구축을 통해 융합과 확장을 빌려 창출할 수 있는 이미지를 선호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 의도와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가 창출되기도 하지만 더 많이 또 다른 시각적 무의식이 작동함으로써 새로운 낯선 이미지들이 발현되기를 기대한다. 빛의 흐름, 색의 흐름, 물감의 흐름 등 새로운 배열을 시도하며 혼합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캔버스 안의 것만이 아닌 캔버스 밖에서 움직이는 여분의 것들을 보다 선호하게 된다. 이런 데서 예기치 않은 가상이 창출되기를 기대하기 위함이다.
근작들에 등장하는 주 이미지들은 그럼으로써 가상의 추상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이것들은 현대 양자물리학의 끈 이론이 시사하는 여분차원에서 영감을 받아 컴퓨터를 써서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끈이 아니라 브라이언 그린(B. Green) 같은 초끈이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양자적 진동으로 이루어지는, 요컨대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상적 끈의 진동 패턴과 에너지를 동반하는 가상의 끈들의 연결을 상징한다. 이는 물방울과 같은 거품효과들을 만들어 시각적 착시 효과를 주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이 이미지들은 현실 이미지에서 추상한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 사고로부터 출발하여 변형과 융합을 거쳐 만들어지는 가상의 이미지들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형하고 재배치하여 만들어진 우리 시대의 추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이미지들은 여러 형태의 다원적 세계 속에 존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추상적 가상이미지는 관람객들의 상상과 무의식을 자극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유발할 것으로 기대한다.
1-3. 소재와 방법 면
가변적 추상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나의 시도는 입체회화작업과 미디어작업을 두루 병행하고 이들을 연계하고 융합함으로써 이미지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있다. 나의 <Visual Poetry>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입체회화작업은 변형 캔버스의 조작을 빌리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에 굴곡을 주고 그 위에 색들을 칠하고 광택을 주어 고정된 평면에 유동적인 조각적 입체공간을 창출한다. 이는 평면의 2차원을 3차원의 복잡계로 확장하기 위함이다.
미디어작업은 영상이라는 매체적 특성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듯한 환영을 만들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추상적 이미지를 확장시켜 관람객들의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을 아울러 자극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미디어아트를 빌려 전통 이미지와 융합시키고 확장시켜 디지털 환경 안에서 아날로그 이미지를 수작업으로 담아내고자 하였다. 전통회화에서 보여주는 매체적 물질성과 테크놀로지를 융합하여 단지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아닌 예술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기반으로 미술의 확장성이 극대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Visual Poetry>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보지 못한 것 까지도 볼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감각만이 아니라 감은 눈과 마음의 눈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각적 환상은 물론 캔버스 밖의 세계와 가상까지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다. 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환상은 단지 시각적 지각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시각적 지각뿐만 아니라 촉각적 지각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의 원근법으로 그려진 공간만이 아니라 단일 시점으로 파악 될 수 없는 가변적이고 다양한 추상적 형태와 색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단순히 감각적 시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점으로 시각을 자극하기 위해 촉각을 포함한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을 빌려서 인식되어야 한다.
1-4. 예상되는 결과
나의 근작 <Visual Poetry> 시리즈는 이전 세기의 굳은 이미지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우리의 희망, 꿈, 비밀, 감정 등을 투영하는 거울이기를 기대한다. 색의 배열과 움직임에서 관람객들이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나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나의 근작들은 회화와 시라는 최소한 두 개의 장르의 융합을 시사한다. 시적 표현효과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채도를 최소 7~8도로 높이고 색의 농도가 강한 하이크롬 색상을 사용했다. 물감의 가변적 표면효과나 재료의 물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얼룩이 거품과 같은 표면효과를 유발해서 추상표현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그럼으로써 강한 자극을 만들고 표현효과를 증대시키고자 했다. 고채도의 색면과 함께 색면들 사이에서 부상되는 거품효과는 종래의 추상화가 보여주는 단조로움을 깨뜨림으로써 표현효과를 증대시키려는 데 의의가 있다. 신비로운 느낌과 함께 시적 환영과 환상이 동반되는 결과가 여기서 창출될 것이다.
이처럼 근작들은 본다는 것의 의의를 과거의 그것과 배타적 입장에서 접근했다.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발견했을 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봤듯이, 우리 시대 또한 기존의 회화에서 학습했던 추상화가 아닌 그 너머의 세계로 것에서 추상회화의 판을 궁구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추상 세계에서 떠나 이것들의 해체와 재배치를 빌려 오늘의 다원적 세계를 창출해야 한다.
김덕용, 玄- 우주를 품다, 128x120cm, morher of pearl, carbonization on wood, 2022
김덕용, 玄- 우주를 품다, 128x122cm, morher of pearl, carbonization on wood, 2022
김덕용, 玄- 우주를 품다, 100x100cm, morher of pearl, carbonization on wood, 2022
심현(深玄)을 향한 의경(意境)
김찬동(전시기획,전 수원시립미술관장)
언젠가 교외에 장만한 지인의 새 집에 초대받았을 때, 집주인은 하늘을 향해 뚫린 유리 천정을 자랑하며 밤마다 무수한 별들과 우주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일상에서 별을 올려다 볼 기회를 잃고 사는 필자에게 그의 말은 단순한 자랑 그 이상이었다. 한옥에 살던 선인들은 외부의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되도록 창을 넓게 만들기도 하고 지붕창을 만들어 실내외를 하나로 통하게 하는 자연관을 구현했다. 이러한 차경(借景)의 방식은 단순히 자연을 받아들여 즐기는 차원을 넘어 내부 공간을 소박,단순화하면서 그 공간에 거주하는 인간의 내면을 비우기 위한 사유이기도 했다.
김덕용의 작품들은 인물이나 한복,달 항아리 등 전통적 요소들이 배치된 실내를 소재로 다루면서 부분적으로 창밖의 풍경들을 병치하는 방식을 보여 왔다. 근작에서는 과거의 작품과 달리,인물들은 보이지 않고 윤슬로 반짝이는 가없는 바다와 무수한 별들이 흩어진 밤하늘의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작품에는 실재 목재를 화면에 부착하여 형상화한 마루나 기둥,창,문 그리고 가구들이 등장하는 데, 명시적이진 않지만 전통 한옥의 공간을 염두에 둔 듯 실내와 외부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해 내고 있다. 그의 <차경(借景)> 연작은 내부 공간과 외부공간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아냄으로써 이러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실내 공간이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도 내부의 공간이 외부까지 확장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가변성과 비움을 기본으로 하는 전통 건축의 공간관에 익숙함을 드러내고 있다. 근작에서는 건축적 요소의 비중이 약화되는 대신, 풍경 이미지가 강화되어 있다. 좁은 기둥들 사이로 넓게 펼쳐지는 바다나 밤하늘이 그것이다. 또 <심현(深玄)> 연작에서는 건축적 요소가 최소화되거나 배제된 채, 달 항아리와 같은 기물이나 풍경 그 자체만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의 시선과 관심이 점차 차경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요소들로 옮겨가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인 인물이나 꽃,한복,자개 장롱,전통가옥 등의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감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부드러움은 그의 의식 심층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과 공포, 젊은 날 아픈 기억들의 승화된 것이다. 광주 5.18의 현장에서 경험한 죽음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공포, 적응하기 힘든 낯선 환경과 빈곤,고독과 싸워야했던 서울에서의 대학 시절, 청춘의 아픔과 방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한 힘은 어머니의 사랑과 고향의 친구들이었다 한다. 그의 작품 속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 남도의 자연과 인간들에 대한 향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그의 근작은 이러한 향수와 그리움을 정신적,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승화시켜내고 있다. 그의 <차경>이나 <심현>은 그가 추구하는 근원적인 세계,시원성에 관한 동경과 희구를 드러내고 있다. 차경의 대상이 되는 바다와 하늘(우주)은 그에게는 생명의 시원이 되며 회귀해야하는 본질적 세계인 것이다. 그는 이 세계를 바다의 심연에서 나고 자란 생명체인 자개의 단편들과 존재를 태우고 남은 재와 숯가루로 형상화 한다. 자개의 편린들로 형상화한 윤슬이나 별들의 반짝임 그리고 달(항아리)의 광채는 자연에 함축된 영겁의 흔적을 담고 있는 재료들에서 작가가 읽어낸 시원의 언어와 형상이다. 이러한 자각과 감수성을 통해 작가는 영속과 순환의 우주 안에서 하나의 작은 존재인 자신을 발견해 내고 있다.
“ 태초 우리는 우주의 한 점이련가......
한줌의 형체는 하나의 점이되어 심현의 공간에 한 톨의 씨앗과 진주로 뿌려져
새로운 생명으로 움트고 다시 우리에게 따뜻한 감성으로 비춰온다.”(작가 노트)
그의 작업 과정은 깊은 심현에 영속과 순환을 위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심정의 발로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현실을 떠난 관념의 세계를 노닐지 않고, 치밀하고 정교하면서도 지난한 장인적 공력으로 현실과 마주한다. 자개를 자르거나 빻아 가루로 만들고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어 안료와 섞어 원하는 색을 얻어낸다. 육체와 땀으로 물질에 부딪치며 그 물질에 정신과 혼을 넣어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동양화론에선 이러한 작가의 주관적 정서와 객관적인 물상의 결합을 의경(意境)이라 한다. 의경은 작가의 사상이나 심미의식이 작가의 체험과 융합하여 그 정신과 기질을 드러내는 것이며, 작가의 주관적 심미의식을 작품상에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창작과정에서 의(意)의 개념은 작가가 객관 대상을 관조하고 내면에 융합시킨 주관적 평가와 아울러 예술적 사유에 의해 재창조되어 형성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또한 경(境)은 작가의 심미의식 속에 묘사되어 구체화된 풍경이나 사물을 가리키며 예술가가 객관사물에 대한 관찰과 체험을 통해 자연의 본연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즉, 단순한 객관의 묘사에 머무르는 것에서 벗어나 심미대상의 본질에 역점을 두어 그 정수를 취하는 것이다.
김덕용의 작품은 긴 여정을 통해 심현을 관조하는 단계에 이른 것 같다. 심현을 그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의 세계로 피상적으로는 혼돈처럼 보이나 그 안에 빛과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근원적 세계라 할 때, 그는 인간이 나고 돌아갈 그 곳을 그리워하며 그 시각으로 사물과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구사하는 이미지들은 단순히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경물(景物)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본질에 관해 질문하는 통감각적 소산이며, 피상적으로 볼 때, 그의 화면은 사실적 묘사의 결과라기보다는 추상성을 가진 하나의 물성적 특성을 가진다. 물론, 그 물성은 서구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사물로서의 회화적 본질을 추구하는 차원과는 다른 것이다. 물질과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며,몸 전체로 자연과 우주만물의 자체의 원리로 자연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려는 태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자개의 편린과 재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곳에 감추어진 우주의 빛과 어둠의 언어를 탐구하고 표출하는 그의 근작들에서 영속과 순환의 심현을 향한 의경의 세계를 보게 된다.
승지민, Genesis of Life I (Cell Division), 30x32cm, Overglaze painting on porcelain, 2021
승지민, Genesis of Life II(Cell Division), 30x32cm, Overglaze painting on porcelain, 2021
승지민, Procreation V, 30x32cm, Overglaze painting on porcelain, 2021
승지민, Procreation VI, 30x32cm, Overglaze painting on porcelain, 2021
Installation view of Seung Jeamin's Moon jar
생명을 품은 달항아리
“여성은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작가 승지민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은 위대하다. 나는 여성의 위대함을 사랑하고 동경하며 표현한다. 달항아리와 인체 토르소, 석류를 통해 나의 내면의 메세지를 발전시켜왔다.
동서양에서 모두 여성과 다산, 풍요로움을 뜻하는 석류. 그림이 그려지는 매체는 여성의 뒷모습 형상의 도자기 토르소 또는 달항아리이다. 이 두 매체는 모두 여성을 상징한다.
석류에 몰입하여 작업하는 중, 석류의 알갱이들이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마 안에서 깨져 나온 달항아리가 더욱 강인한 여성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위대한 생명력의 시작. 세포분열이다.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는 그 불룩한 형태가 풍만한 여성의 모습과 같아 생명을 품는 여성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일뿐더러, 동양의 음양陰陽 철학에서 달은 음陰, 즉 여성을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달항아리는 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체 달항아리 작업에 이어 직접 만든 달항아리 모양의 평면 타일, 혹은 틀을 제작하여 만들어낸 둥근 부조 형태의 벽걸이 달항아리에 그림을 그리는 시도를 해 보고 있다. 우리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한국의 21세기 동시대성을 가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한다.
아트놈, 달과 토끼, 72.7x60.6cm, Acrylic on canvas, 2022
스마트한 자기유희, 아트놈의 ART-POP
“혼성잡종의 예술학, 루이비통이 슈프림을 만났을 때”
안현정 (예술철학박사, 미술평론가)
친근하면서도 사랑스런 캐릭터들이 유명상표 혹은 신화적 모티브들과 어우러졌을 때, 우리는 미술에 대한 가치판단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작품들은 강렬한 시각적 모티브들 속에서 유머러스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해학적이면서도 현상을 파고드는 아트놈 만의 독특한 시대 해석을 녹여낸다. 이질적인 가치가 우연과 필연의 무분별한 뒤섞임 속에 존재하는 ‘혼성잡종의 시대(The age of various hybrids)’, 아트놈은 옳고 그름의 가치 역시 상황과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왕이면 멋지게, 기왕이면 예술적으로!”
아트놈 작가의 새로운 시리즈를 나타내는 기본코드는 강력한 시각적 모티브, 전통 요소(신화 혹은 역사화)의 차용, 자기복제술과 유희(Funnyism), 혼성잡종 시대 속 간결함(평면화), 현실에 기반한 스토리텔링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고정된 의미체계를 해 집고 재해석하여 보기 좋게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탁월함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팝아트의 본질과 맞닿으면서도, 예술적 유희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기존의 팝아트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21세기 혼성주체의 변화된 풍속도를 대변하듯, 아우라(Aura 혹은 권위)를 머금은 전통적인 도상들은 픽토그램(Pictogram)으로 연결된 루이비통(LOUIS VUITTON)과 슈프림(SUPREME)의 코드와 결합함으로써 밀레니엄 속 가상플랫폼에 등장하는 코스프레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작가는 고매한 전통미술이 갖는 순수성의 가치를 유머코드로 전환시킴과 동시에 ‘키치(Kitsch)’ 자체를 신자유주의 속 문화그룹 안에 위치시킨다.
아트놈을 보면 미술대학을 다닌 적이 없지만 풍자와 창의적 규칙을 만들며 사회의 논란거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이 떠오른다. 재밌고 창의적인 아트놈의 위트는 ‘나’보다는 ‘우리’, ‘꿈’보다는 ‘현실’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제지하지 못할 장난스런 행보들은 가벼운 현상 자체를 직관적으로 드러내기에 더욱 깊이가 있다. 부분보다는 전체를 먼저 본다는 그는 타고난 천재기질을 가졌다. 남들이 봤을 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가 하면, 신화화된 캐릭터나 슈프림의 패턴들을 텍스트와 결합하는 이질적인 실험들을 감행한다. 아트놈에게 아트란 세상과 가장 재밌게 대화하는 방식이자 온전한 자신으로 살게 해주는 행복한 매개체인 것이다. 오늘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선 아트놈의 행보는 작품이 만들어진 오늘의 흔적이 아닐까.
“나는 세상으로부터 한 발 짝 떨어져 있는 현실을 기록한다. 오늘을 외면하는 예술가는 천재소리는 들을지언정 오래갈 수 있는 동력은 탑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위트 있는 유머로 세상과 자신을 균형감 있게 직시하고 싶다.” - 아트놈 인터뷰 중에서
이상협, moon, 37x37x37cm, silver, 2021
이상협, new icicle, 20x20x20cm, silver, 2022
나는 기(器)’라는 절제된 형태 안에 한국적인 조형미라는 문화적 코드를 담아내고 있다. 작품 표면에 녹아 내리는 듯한 유연한 선과 작은 흔적들로 장식된 질감은 한국적인 문화 코드의 기형 위에 새로운 변화를 담으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나는 형태와 표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각한다. 나의 작품에서 형태는 표면을 낳고, 표면은 다시 형태로 이어진다. 나에게 작품의 형태는 문화나 다름없고, 표면은 세대와 같다. 표면이 바뀌고 변화하면서 형태가 만들어지듯, 세대가 바뀌면서 문화가 달라지는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에서 표면의 질감이 미세하게 모두 다른 까닭은 이와 같은 철학이 투영된 결과이다.
망치질이라는 기본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금속이라는 물성이 반하여 한계에 도전하는 제작과정이 나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축이다. 나는 우리나라 전통 도자의 기형을 금속으로 재현하면서, ‘기(器)’라는 절제된 형태 안에 한국적인 조형미라는 문화적 코드를 담아내고자 한다. 작품표면에 녹아 흘러내리는 듯 유연한 선과 작은 흔적들로 장식된 질감은 한국적인 문화코드의 기형 위에 새로운 변화를 담고자함이다. 작가로서 지속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둔다. 이 말은 여러 방향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현재의 작업과 완성된 결과물이 다음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와 힘이 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작가 이상협
Installation view of Lee yong soon's Moon jar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개인의 사소한 물건에서 생활의 큰 부분까지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며 자신과 주변 세계를 창조하고 구축해 왔다. 인간에게 만드는 손은 노동을 의미함과 동시에 지적사고의 발현이며,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주는 구체적 행위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개인의 삶에 만드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 시대는 그야말로 기계와 거대 산업에 의한 공급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생산의 효율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적당히 쓸모 있는 물건들이 대량으로 공급되는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서 창작과 자급의 기회를 빼앗고, 삶의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마저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물건을 잘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솜씨가 좋아야 한다. 솜씨 좋은 손은 비범한 소질과 재주뿐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반복을 거듭한 경험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진다. 경험의 축적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전문적인 지혜와 기술을 익게 하고, 제작자의 고상한 취미는 기교를 가지게 하여 물건을 아름답게 만든다. 또한 일에 대해 성실하고 근면한 자세를 지닌 사람이 좋은 물건을 탄생시킨다. 노력의 결실로 태어난 좋은 물건은 제작자에게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고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동기와 애정을 부여한다. 이러한 동기와 애정을 토대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사명감으로 수행하는 사람, 특별히 장인이라고 부른다. 수작에 참여한 이용순은 백자 달항아리를 만드는 데 있어 뛰어난 솜씨를 지닌 우리시대의 장인이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물건들은 원래 실생활에 쓰이던 아주 사소한 물건으로 출발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들의 인생을 관통하는 높은 경지의 것으로 탄생하였다. 갤러리를 들어서면 다양한 크기의 백자 달항아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크고 둥근 선, 백설같이 하얗게 빛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항아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질박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모습 그 자체로 자연임을 깨닫게 한다. 이용순은 고미술품 복원업에 종사해오다 백자에 매료되어 백자의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처음에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옛 백자의 색상과 모양뿐만 아니라 느낌까지 고스란히 재현하려다 보니 생기는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소지(흙)와 유약의 테스트뿐만 아니라 기벽의 두께, 전과 굽의 넓이와 높이, 기울기 등 형태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백의 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직접 산에서 흙을 채취하고 불순물을 일일이 걸러내는 작업(수비)등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달 항아리는 백자 소지의 물성적 한계로 두 개의 큰 대접 형태를 아래위로 접합시켜 만드는데,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이므로 반듯한 모양을 이루는 것도 있지만 만드는 이의 손길에 따라 접합 부분의 이음선이 보이거나 어느 한 쪽이 살짝 기울어지는 것도 있다. 이용순의 백자 달항아리는 의도하지 않은 부정형의 무심한 듯 자연스러운 조형미와 그만의 여유로움을 잘 담아내고 있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큐레이터 조지혜
이이남, 달항아리 풍경, 90.5x152x15cm, 65inch LED TV,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Running time 19min 43sec, 2009
이이남, DNA 달항아리, 120x120cm, Printing on titanium mirror, Edition of 6, 2022
고전회화와 인연을 맺어온 그간 작업을 통해 고전회화가 나에게 갖는 의미가 어떠한지 주목하였다.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여 성장하기까지 자연스럽게 접한 남도의 풍경과 회화(남종화)들이 감각적 세포에 스며들어 본능적으로 고전회화를 택했으리라 본다. 이러한 인연관계들을 되짚으며 대상을 풍경(Landscape)라 부르는 서구적 관점보다 ‘산수(山水)’라 칭하는 동양의 정신을 추구하여,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로 자아를 성찰하고자 한다. 작가는 팬데믹 속에서 이성중심의 모더니즘에 한계를 경험하며 대상과 주체를 객관화하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대상과 주체가 공존하는 동양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작가 이이남
이종기, 달항아리1,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이종기, 달항아리2,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이종기, 달항아리3,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달항아리에 대한 담론은 시공간에 따라 끊임없는 해석의 변화가 있게 된다.
신화와 자연, 당대의 기술과 예술관을 품고 있는 역사적 사물인 도자기는 일상보다 더 집약된 소우주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미니멀과 간결함의 극치인 달항아리에 대한 담론은 달항아리를 보며 우리의 정신을 보는 것이고 결국 자신에 대한 성찰과, 물질보다는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달항아리는 정신을 담고 있는 머리, 열정을 담고 있는 가슴, 무엇보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림 그 자체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달항아리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이유이다. 또 하나의 축은 도자기 밖의 세계, 그러나 도자기만큼이나 오래되고, 그래서 사실과 환상이 반반씩 섞여 그 경계가 도자기처럼 깨지기 쉬운 그런 세계이다. 이 낯선 우주의 장면 안에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대중문화의 대화가 존립하고 있다.
백자 항아리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던 수화 김환기는 달항아리에서 우주를 보았다. 김환기의 우주 속에는 김환기가 보았던 달항아리가 있으나, 늘 영감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온 이종기는 달항아리에 달을 그린 유일한 작가이다. 그는 달항아리라는 우주로 달을 보냈고, 진짜 달을 투사하며 ‘달항아리의 달’이라는 언어적 유희를 즐긴다. 그리고 이종기의 인챈티드 화이트 시리즈의 흰색은 달항아리의 색이 되었다.
달항아리라는 우주에 투사된 것은 달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달항아리를 유영하고 있는 슈퍼맨을 본다. 이종기는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변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작품에 한국의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담아왔다. 전통이 지닌 가능성과 가치를 믿는 그의 작품에서 슈퍼맨이라는 서양의 물질에 달항아리라는 하나의 오브제를 통해 동양의 정신이 들어가는 정신적 콜라주(collage)의 형성과 달항아리와 전통의 아름다움에 뿌리를 내리는 새로운 우리 자아의 구현을 보게 된다.
누구보다 동양의 정신을 나타내고자 했던 백남준의 <TV 부처>, <Video 부처>(쾰른 현대 미술관 퍼포먼스)에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한 TV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재생산한다. 참선하는 부처의 모습을 빌어 자화상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종기의 패러디 작품을 보면 내가 나를 봄인데 부처로서 달을 바라봄이다. 아직 나의 자아로 확립되지 않은 타자의 이미지로서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자아의 재확인으로써 보는 것이다. 거울에 반영되는 자신의 이미지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아가 인식하는 자아의 모습이지만 타인이 투영되는 이미지는 자신의 모습과 익숙하지 않은 타자와 같은 다른 모습과 인상이다. 자아의 입장에서 분열되어 나온 하나의 타자이며 피드백으로 돌아오는 작품 자체가 바로 인간화된 예술로 해석된다. 작품 속을 자세히 보면 가부좌를 하고 달을 바라보는 부처의 등에 백남준 싸인이 보인다.
이종기의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관람객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미적체험이 가능하다. 다양한 미디어를 매개로 몰입 하고 사유하는 현대인은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가상의 세계에 진입할 것이다. 철학적 사유와 예술작품은 때로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늠자로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이종기
정현숙, Before and After, 50x50cm, Oil, crystal and Mother of Pearl on Canvas, 2022
정현숙, Before and After, 60x60cm, Oil, crystal and Mother of Pearl on Canvas, 2022
정현숙, Before and After, 70x70cm, Oil and Mother of Pearl on Canvas, 2022
우리의 전통양식 중에 나전칠기는 용도와 수요가 사라져가고 있다. 그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자개는 가구의 장식 재료로 이용해왔으며 공예적인 요소로만 생각해왔다.
자개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현대적 조형으로 재해석 하고자하는 작업이다. 여러 칼라를 입힌 자개를 넓이 1mm 안 밖으로 얇게 잘라 규칙적이거나 혹은, 불규칙적인 도형을 만들고 그로인해 만들어진 작은 공간에 스와로브스키 등 크리스탈을 부착하여 비구상적이며 장식적인 화면으로 보이게 했다. 그로 인한 반복성, 캔버스 밑색의 컬러와 자개컬러의 조화, 그리고 자개와 크리스탈로 인해 발생하는 빛을 표현한다. 구상작업으로는 조선시대의 달항아리와 초충도의 나비 등도, 도입하고 있다. 자개의 두께나 컬러도 다양하게 이용하며 자개의 뒷면에 색을 칠해 다양한 색의 자개를 만들어 작업하고 있다. 前(Before)과 後(after)라는 명제가 보여주듯이 과거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우리 앞에 되살아나는 시간성에 중점을 두었다.
‘달은 옛 달이로되,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 라는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시를 생각해본다.
전통적 재료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역사에 빛을 더해본다.
정현숙
해피하트 in 달항아리, 72.7x60.6cm, Spray paint on canvas, 2022
달항아리, 72.7x60.6cm, Spray paint on canvas, 2022
대학시절 그래피티에 많은 영감을 받고 2년간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다 졸업 후 호주, 캐나다 등을 여행하며, 원주민과 인디언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에게 기쁨, 희망,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항상 예술이 무엇이고, 내가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즐겁게 작업을 하고 있다. 나에게 작업이란 나와 타인 그리고 이 세상을 알아가는 행위이자 즐거움이다. 작업 안에서 내 자신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다. 예술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며, 상상력을 만들어 주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해피하트
하트 캐릭터는 내 자신을 대변한다.
항상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고 살피며, 연약하고 때론 두려운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간다.
나도 한때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을 경험한 적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의 힘으로 극복이 된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해피하트'들이 바이러스처럼 움직이며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모든 이들이 '해피하트' 이미지를 통해 행복한 에너지를 받아 웃음이 지어질 수 있길 소망한다.
찰스장
karma 20225-53, 120x110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karma 20225-49, 100x92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기억의 이미지
나의 그림은 기억의 이미지화, 소통의 매개체다 .
기억은 특정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미지를 통해 기억은 표출된다.
'지각과 경험의 울타리'(기억)에 근거해 어떤 의도가 시도되고 감정이 표출되고 소재나 재료, 색감이 선택되고 이것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
결국 내가 표현한 이미지는 내 삶의 기억, 내 삶의 이야기들이다.
나는 내 그림속에 내 삶의 이야기들을 펼쳐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그림을 보는 다른 이들은 내 그림속에서 본인의 이야기와 기억을 끄집어 낼 것이다. 나의 기억이라는 것이 다른 이의 기억과 연결
되며 그 관계에서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내 삶'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게 되니 결국 보편적 인간을 표현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작품을 보는 것은 나의 내부로 잠행해 들어가는 동시에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 자신의 속으로들어가 보는 것이 된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찾는 과정이다
'나'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닫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통'이 이루어진다.
나의 그림은 결국 그 '소통'을 위한 매개체다.
소통은 단순한 현재의 언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 나와 너를 잇는 소통의 매개체가 바로 내가 표현한 기억의 이미지들이다.
내 그림에 보이는 달 항아리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다.
나는 달항아리라는 이미지를 소통의 매개체로 선택했다.
달항아리와 조용히 만나본 적이 있는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지만 극도로 세련된 그 피조물을 먹먹히 보고 있노라면 그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가를 그는 이미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달항아리 그리는 작가로 안다
하지만 나는 달항아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 안에 내 삶의 이야기를 풀었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았고 찾았다.
내가 그린 ‘karma는 선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
그 선은 도자기의 빙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길이다.
갈라지면서 이어지듯 만났다 헤어지고 비슷한 듯하며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하나로 아우러진다.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는 어떤 운명안에 삶의 질곡과 애환, 웃음과 울음, 그리고 결국엔 그런 것들을 다 아우르는 어떤 기운...
꾸밈없고 단순한 형태와 색감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측은지심 같다.
우리는 본디 착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나
이렇듯 도자기는 내 삶의 기억들의 이미지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달항아리는 말이다.
내가 그 안에 기억을 넣어주면서 그것은 단순한 도자기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 되었다.
여러 선과 흔적은 시공을 초월한 암호이고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그 암호를 풀어나간다.
나의 그림을 바라보며 한 기억을 떠올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라
그 속에 착한 인간의 존재가 있다.
그 안에서 삶의 이야기를 찾는 여정을 시작해보기 바란다.
그 안에서 우린 만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최영욱
하태임, 달항아리,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달항아리
순백색의 달항아리는 담백하고 넉넉한 조형미로 오랜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나에게 백색은 순수하고 담담한, 수용하고 밖의 것을 끌어안는 색이다. 동시에 시작의 색이기도 하다.
내가 그린 달항아리는 캔바스 공간에서 약간 비껴나가 있다.
캔바스 틀에 걸쳐져 구성되었는데 이는 확장되어지는 원의 형태를 사각 프레임에 담기엔 답답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토끼와 월계수가 살고 있다는 보름달을 올려다 보며 우리의 꿈과 소원을 떠올려 본 경험이 있듯이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달항아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오색 꿈조각을 투영시켜 보고 싶었다.
하태임
하태임, 달항아리,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_ 시대의 눈 : 해석된 달항아리
이시대 작가들이 재해석한,
각각의 심미안이 담긴 달항아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살펴 보는 전시
참여작가 : 권현진, 김덕용, 도상봉, 승지민, 아트놈, 이상협, 이용순, 이이남, 이종기, 정현숙, 챨스장, 최영욱, 하태임 총 13인
1300도 가마에서 일어나는 때와 불의 조화, 신의 손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움이라 불리우는 이조백자 달항아리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오늘날의 수많은 작가들에게도 영감을 주고 한국적 조형미의 극치로 평가받고 그 있다. 그 달항아리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의 심미안은 달항아리로 시작되었다”는 김환기화백은 그것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한국의 산천과 달, 매화, 여인들을 함께 그렸다. 그 이후 달항아리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고 수많은 미술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무더운 여름 한 줄기 소나기를 내리고 저쪽 하늘에 다시 피어오른 눈 같은 뭉게구름과 큰 바다와 호수와 강가 겨울산과 바람을 생각하기도 한다.”고 정양모 관장이 표현했던 백자대호 달항아리, 소박한 어깨에 당당한 굽, 둥근 팔각에서 오는 편안함, 거기에 풍만함과 준수함은 어떤 것도 품을 수 있는 군자의 마음을 지녔고, 시작 끝의 개념을 모두 함축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달항아리는 우리나라 고유의 정체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장 평범하고 단순한, 기교를 부리지 않은 비정형의 형태가 품은 너그러움과 넉넉함이 한국민의 정서와 깊이 맞닿아 있다.
둥근 형태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에너지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달항아리. 한국적 아름다움의 정수 달항아리, 이에 대한 현대적 시선을 가진 작가들은 달항아리를 어떻게 해석할까? 갤러리나우는 현재 화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작가들이 해석한 달항아리에 대한 시선을 살펴 보는 전시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 _ 시대의 눈 : 해석된 달항아리>展을 마련했다.
갤러리나우는 2020, 2021년 2회에 걸쳐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전을 열어서 많은 관심을 받은 바 있다. (참여작가 : 강익중, 고영훈, 구본창, 김덕용, 김용진, 석철주, 최영욱, 신철, 김판기, 이용순, 오만철. 전병현... )
2022 세번째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 _ 시대의 눈: 해석된 달항아리>展은 이 시대에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러작가들이 달항아리를 각각의 심미안으로 재해석한 작업들을 보여준다. 권현진, 김덕용, 아트놈, 이상협, 이용순, 이이남, 이종기, 정현숙, 챨스장, 최영욱, 하태임등 작가들에 의해 박물관에서 문화재로 있던 그 달항아리는 이 시대의 아티스트의 시선을 통해서 시대적이 해석이 더해져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재탄생 되는 자리이다. 아울러 자신의 호를 도천(陶泉·‘도자기의 샘’이라는 뜻)으로 지을 만큼 도자기를 사랑했던 도상봉(1902~1977)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권현진, VISUAL POETRY X MOON JAR, 76x76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권현진, VISUAL POETRY X MOON JAR, 76x76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권현진, VISUAL POETRY X MOON JAR, 76x76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이미지 탐험의 새 지평 : 보이지 않는 것의 가시화
미술학 박사 권현진
1-1. 요약
지난 세기의 중심 과제였던 근대주의에 의한 미술은 21세기를 맞아 재사유를 필요로 한다. 이전 세기의 미술에서 가령 추상화란 지각 가능한 자연 이미지를 제거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환영을 배제한 2차원 평면으로 환원코자 했다는 데 뜻이 있다. 예컨대 몬드리앙은 보이는 자연의 외관을 수평수직의 형식으로, 그리고 말레비치는 플라톤적 절대형태로 각각 환원하였다.
이제 이러한 의미의 환원주의 미술은 그 기반 자체를 재고해야 할 때다. 21세기 미술은 재현과 서술, 그리고 환영을 지우고 비워나가는 20세기 패러다임의 연장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의 미술은 우리시대의 과학적 세계관이 주창하는 시간과 공간의 여분차원(extra dimension)으로 눈을 돌려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방향에서 재고해야 한다. 그 방향은 추상회화의 원조인 칸딘스키와 몽드리앙 그리고 뉴욕 추상표현주의가 지향했던 가시적인 자연을 개념적인 것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것과는 어쩌면 정반대의 방향에서 해법(지표)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분으로 존재하는 불가시적 세계의 이미지를 가시세계의 것으로 불러들여 이것들을 현존세계의 이미지와 융합함으로써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장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보이는 세계의 시⋅공간의 해체는 물론 재구축을 빌려 존재 가능한 세계의 이미지를 적극 창출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21세기 미술이 다루어야 할 이미지란 추상과 구상의 구분을 초극해서 종래의 본질이나 형식 같은 관념적 요소로부터 이미지는 해방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창발될 가상이 이미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1-2. 아이디어 면
나의 근작들은 이전과 같은 자연의 이미지들에서 형식을 추출하는 의미에서의 추상이미지를 다루지 않는다. 자연의 내용들을 비워가는 추상화가 아니라 그 역의 맥락에서 용합과 혼성에 의한 추상이미지를 다룬다. 눈에 보이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단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빛을 봤을 때 안구에 맺히는 가상의 환영들을 시각적 이미지로 그려내려는 데서 시작한다. 이는 과거의 추상적 사고를 역으로 추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를 빌려 끝없는 구축과 해체, 재구축을 통해 융합과 확장을 빌려 창출할 수 있는 이미지를 선호한다. 이 과정에서 처음 의도와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가 창출되기도 하지만 더 많이 또 다른 시각적 무의식이 작동함으로써 새로운 낯선 이미지들이 발현되기를 기대한다. 빛의 흐름, 색의 흐름, 물감의 흐름 등 새로운 배열을 시도하며 혼합하고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캔버스 안의 것만이 아닌 캔버스 밖에서 움직이는 여분의 것들을 보다 선호하게 된다. 이런 데서 예기치 않은 가상이 창출되기를 기대하기 위함이다.
근작들에 등장하는 주 이미지들은 그럼으로써 가상의 추상 이미지들이 주를 이룬다. 이것들은 현대 양자물리학의 끈 이론이 시사하는 여분차원에서 영감을 받아 컴퓨터를 써서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끈이 아니라 브라이언 그린(B. Green) 같은 초끈이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양자적 진동으로 이루어지는, 요컨대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상적 끈의 진동 패턴과 에너지를 동반하는 가상의 끈들의 연결을 상징한다. 이는 물방울과 같은 거품효과들을 만들어 시각적 착시 효과를 주려는 시도를 포함한다. 이 이미지들은 현실 이미지에서 추상한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 사고로부터 출발하여 변형과 융합을 거쳐 만들어지는 가상의 이미지들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형하고 재배치하여 만들어진 우리 시대의 추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상의 이미지들은 여러 형태의 다원적 세계 속에 존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나의 추상적 가상이미지는 관람객들의 상상과 무의식을 자극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유발할 것으로 기대한다.
1-3. 소재와 방법 면
가변적 추상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나의 시도는 입체회화작업과 미디어작업을 두루 병행하고 이들을 연계하고 융합함으로써 이미지의 경계를 확장하는 데 있다. 나의 <Visual Poetry> 시리즈에서 볼 수 있는 입체회화작업은 변형 캔버스의 조작을 빌리기 위해 스테인리스 스틸에 굴곡을 주고 그 위에 색들을 칠하고 광택을 주어 고정된 평면에 유동적인 조각적 입체공간을 창출한다. 이는 평면의 2차원을 3차원의 복잡계로 확장하기 위함이다.
미디어작업은 영상이라는 매체적 특성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듯한 환영을 만들고자 하는 데 뜻이 있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추상적 이미지를 확장시켜 관람객들의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을 아울러 자극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미디어아트를 빌려 전통 이미지와 융합시키고 확장시켜 디지털 환경 안에서 아날로그 이미지를 수작업으로 담아내고자 하였다. 전통회화에서 보여주는 매체적 물질성과 테크놀로지를 융합하여 단지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 아닌 예술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기반으로 미술의 확장성이 극대화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Visual Poetry>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보지 못한 것 까지도 볼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감각만이 아니라 감은 눈과 마음의 눈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각적 환상은 물론 캔버스 밖의 세계와 가상까지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다. 나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환상은 단지 시각적 지각으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시각적 지각뿐만 아니라 촉각적 지각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의 원근법으로 그려진 공간만이 아니라 단일 시점으로 파악 될 수 없는 가변적이고 다양한 추상적 형태와 색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단순히 감각적 시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점으로 시각을 자극하기 위해 촉각을 포함한 공감각(共感覺, synesthesia)을 빌려서 인식되어야 한다.
1-4. 예상되는 결과
나의 근작 <Visual Poetry> 시리즈는 이전 세기의 굳은 이미지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우리의 희망, 꿈, 비밀, 감정 등을 투영하는 거울이기를 기대한다. 색의 배열과 움직임에서 관람객들이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나 한편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나의 근작들은 회화와 시라는 최소한 두 개의 장르의 융합을 시사한다. 시적 표현효과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기 위해 채도를 최소 7~8도로 높이고 색의 농도가 강한 하이크롬 색상을 사용했다. 물감의 가변적 표면효과나 재료의 물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얼룩이 거품과 같은 표면효과를 유발해서 추상표현이미지를 극대화하였다. 그럼으로써 강한 자극을 만들고 표현효과를 증대시키고자 했다. 고채도의 색면과 함께 색면들 사이에서 부상되는 거품효과는 종래의 추상화가 보여주는 단조로움을 깨뜨림으로써 표현효과를 증대시키려는 데 의의가 있다. 신비로운 느낌과 함께 시적 환영과 환상이 동반되는 결과가 여기서 창출될 것이다.
이처럼 근작들은 본다는 것의 의의를 과거의 그것과 배타적 입장에서 접근했다. 칸딘스키가 추상화를 발견했을 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봤듯이, 우리 시대 또한 기존의 회화에서 학습했던 추상화가 아닌 그 너머의 세계로 것에서 추상회화의 판을 궁구해야 한다. 그래서 기존의 추상 세계에서 떠나 이것들의 해체와 재배치를 빌려 오늘의 다원적 세계를 창출해야 한다.
김덕용, 玄- 우주를 품다, 128x120cm, morher of pearl, carbonization on wood, 2022
김덕용, 玄- 우주를 품다, 128x122cm, morher of pearl, carbonization on wood, 2022
김덕용, 玄- 우주를 품다, 100x100cm, morher of pearl, carbonization on wood, 2022
심현(深玄)을 향한 의경(意境)
김찬동(전시기획,전 수원시립미술관장)
언젠가 교외에 장만한 지인의 새 집에 초대받았을 때, 집주인은 하늘을 향해 뚫린 유리 천정을 자랑하며 밤마다 무수한 별들과 우주를 자신의 방으로 초대하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일상에서 별을 올려다 볼 기회를 잃고 사는 필자에게 그의 말은 단순한 자랑 그 이상이었다. 한옥에 살던 선인들은 외부의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되도록 창을 넓게 만들기도 하고 지붕창을 만들어 실내외를 하나로 통하게 하는 자연관을 구현했다. 이러한 차경(借景)의 방식은 단순히 자연을 받아들여 즐기는 차원을 넘어 내부 공간을 소박,단순화하면서 그 공간에 거주하는 인간의 내면을 비우기 위한 사유이기도 했다.
김덕용의 작품들은 인물이나 한복,달 항아리 등 전통적 요소들이 배치된 실내를 소재로 다루면서 부분적으로 창밖의 풍경들을 병치하는 방식을 보여 왔다. 근작에서는 과거의 작품과 달리,인물들은 보이지 않고 윤슬로 반짝이는 가없는 바다와 무수한 별들이 흩어진 밤하늘의 풍경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작품에는 실재 목재를 화면에 부착하여 형상화한 마루나 기둥,창,문 그리고 가구들이 등장하는 데, 명시적이진 않지만 전통 한옥의 공간을 염두에 둔 듯 실내와 외부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해 내고 있다. 그의 <차경(借景)> 연작은 내부 공간과 외부공간을 한 화면에 동시에 담아냄으로써 이러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실내 공간이 드러나 있지 않은 경우도 내부의 공간이 외부까지 확장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가변성과 비움을 기본으로 하는 전통 건축의 공간관에 익숙함을 드러내고 있다. 근작에서는 건축적 요소의 비중이 약화되는 대신, 풍경 이미지가 강화되어 있다. 좁은 기둥들 사이로 넓게 펼쳐지는 바다나 밤하늘이 그것이다. 또 <심현(深玄)> 연작에서는 건축적 요소가 최소화되거나 배제된 채, 달 항아리와 같은 기물이나 풍경 그 자체만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의 시선과 관심이 점차 차경의 대상이 되는 외부의 요소들로 옮겨가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인 인물이나 꽃,한복,자개 장롱,전통가옥 등의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감성을 표출하고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부드러움은 그의 의식 심층에 내재되어 있는 불안과 공포, 젊은 날 아픈 기억들의 승화된 것이다. 광주 5.18의 현장에서 경험한 죽음에 대한 극심한 불안과 공포, 적응하기 힘든 낯선 환경과 빈곤,고독과 싸워야했던 서울에서의 대학 시절, 청춘의 아픔과 방황을 극복할 수 있게 한 힘은 어머니의 사랑과 고향의 친구들이었다 한다. 그의 작품 속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 남도의 자연과 인간들에 대한 향수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그의 근작은 이러한 향수와 그리움을 정신적,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승화시켜내고 있다. 그의 <차경>이나 <심현>은 그가 추구하는 근원적인 세계,시원성에 관한 동경과 희구를 드러내고 있다. 차경의 대상이 되는 바다와 하늘(우주)은 그에게는 생명의 시원이 되며 회귀해야하는 본질적 세계인 것이다. 그는 이 세계를 바다의 심연에서 나고 자란 생명체인 자개의 단편들과 존재를 태우고 남은 재와 숯가루로 형상화 한다. 자개의 편린들로 형상화한 윤슬이나 별들의 반짝임 그리고 달(항아리)의 광채는 자연에 함축된 영겁의 흔적을 담고 있는 재료들에서 작가가 읽어낸 시원의 언어와 형상이다. 이러한 자각과 감수성을 통해 작가는 영속과 순환의 우주 안에서 하나의 작은 존재인 자신을 발견해 내고 있다.
“ 태초 우리는 우주의 한 점이련가......
한줌의 형체는 하나의 점이되어 심현의 공간에 한 톨의 씨앗과 진주로 뿌려져
새로운 생명으로 움트고 다시 우리에게 따뜻한 감성으로 비춰온다.”(작가 노트)
그의 작업 과정은 깊은 심현에 영속과 순환을 위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심정의 발로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현실을 떠난 관념의 세계를 노닐지 않고, 치밀하고 정교하면서도 지난한 장인적 공력으로 현실과 마주한다. 자개를 자르거나 빻아 가루로 만들고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어 안료와 섞어 원하는 색을 얻어낸다. 육체와 땀으로 물질에 부딪치며 그 물질에 정신과 혼을 넣어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것이다.
동양화론에선 이러한 작가의 주관적 정서와 객관적인 물상의 결합을 의경(意境)이라 한다. 의경은 작가의 사상이나 심미의식이 작가의 체험과 융합하여 그 정신과 기질을 드러내는 것이며, 작가의 주관적 심미의식을 작품상에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창작과정에서 의(意)의 개념은 작가가 객관 대상을 관조하고 내면에 융합시킨 주관적 평가와 아울러 예술적 사유에 의해 재창조되어 형성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또한 경(境)은 작가의 심미의식 속에 묘사되어 구체화된 풍경이나 사물을 가리키며 예술가가 객관사물에 대한 관찰과 체험을 통해 자연의 본연에 접근함을 의미한다. 즉, 단순한 객관의 묘사에 머무르는 것에서 벗어나 심미대상의 본질에 역점을 두어 그 정수를 취하는 것이다.
김덕용의 작품은 긴 여정을 통해 심현을 관조하는 단계에 이른 것 같다. 심현을 그 넓이를 측량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의 세계로 피상적으로는 혼돈처럼 보이나 그 안에 빛과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근원적 세계라 할 때, 그는 인간이 나고 돌아갈 그 곳을 그리워하며 그 시각으로 사물과 인생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구사하는 이미지들은 단순히 시각적 대상으로서의 경물(景物)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본질에 관해 질문하는 통감각적 소산이며, 피상적으로 볼 때, 그의 화면은 사실적 묘사의 결과라기보다는 추상성을 가진 하나의 물성적 특성을 가진다. 물론, 그 물성은 서구 모더니즘이 추구하던 사물로서의 회화적 본질을 추구하는 차원과는 다른 것이다. 물질과의 정신적 교감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며,몸 전체로 자연과 우주만물의 자체의 원리로 자연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려는 태도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자개의 편린과 재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곳에 감추어진 우주의 빛과 어둠의 언어를 탐구하고 표출하는 그의 근작들에서 영속과 순환의 심현을 향한 의경의 세계를 보게 된다.
승지민, Genesis of Life I (Cell Division), 30x32cm, Overglaze painting on porcelain, 2021
승지민, Genesis of Life II(Cell Division), 30x32cm, Overglaze painting on porcelain, 2021
승지민, Procreation V, 30x32cm, Overglaze painting on porcelain, 2021
승지민, Procreation VI, 30x32cm, Overglaze painting on porcelain, 2021
Installation view of Seung Jeamin's Moon jar
생명을 품은 달항아리
“여성은 위대하다.
그 위대함은 생명을 잉태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작가 승지민
생명을 잉태하는 여성은 위대하다. 나는 여성의 위대함을 사랑하고 동경하며 표현한다. 달항아리와 인체 토르소, 석류를 통해 나의 내면의 메세지를 발전시켜왔다.
동서양에서 모두 여성과 다산, 풍요로움을 뜻하는 석류. 그림이 그려지는 매체는 여성의 뒷모습 형상의 도자기 토르소 또는 달항아리이다. 이 두 매체는 모두 여성을 상징한다.
석류에 몰입하여 작업하는 중, 석류의 알갱이들이 생명의 기본단위인 세포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마 안에서 깨져 나온 달항아리가 더욱 강인한 여성의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위대한 생명력의 시작. 세포분열이다.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는 그 불룩한 형태가 풍만한 여성의 모습과 같아 생명을 품는 여성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매체일뿐더러, 동양의 음양陰陽 철학에서 달은 음陰, 즉 여성을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달항아리는 여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체 달항아리 작업에 이어 직접 만든 달항아리 모양의 평면 타일, 혹은 틀을 제작하여 만들어낸 둥근 부조 형태의 벽걸이 달항아리에 그림을 그리는 시도를 해 보고 있다. 우리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한국의 21세기 동시대성을 가진 예술로 승화하고자 한다.
아트놈, 달과 토끼, 72.7x60.6cm, Acrylic on canvas, 2022
스마트한 자기유희, 아트놈의 ART-POP
“혼성잡종의 예술학, 루이비통이 슈프림을 만났을 때”
안현정 (예술철학박사, 미술평론가)
친근하면서도 사랑스런 캐릭터들이 유명상표 혹은 신화적 모티브들과 어우러졌을 때, 우리는 미술에 대한 가치판단에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작품들은 강렬한 시각적 모티브들 속에서 유머러스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해학적이면서도 현상을 파고드는 아트놈 만의 독특한 시대 해석을 녹여낸다. 이질적인 가치가 우연과 필연의 무분별한 뒤섞임 속에 존재하는 ‘혼성잡종의 시대(The age of various hybrids)’, 아트놈은 옳고 그름의 가치 역시 상황과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왕이면 멋지게, 기왕이면 예술적으로!”
아트놈 작가의 새로운 시리즈를 나타내는 기본코드는 강력한 시각적 모티브, 전통 요소(신화 혹은 역사화)의 차용, 자기복제술과 유희(Funnyism), 혼성잡종 시대 속 간결함(평면화), 현실에 기반한 스토리텔링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고정된 의미체계를 해 집고 재해석하여 보기 좋게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탁월함은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팝아트의 본질과 맞닿으면서도, 예술적 유희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기존의 팝아트와는 차별성을 갖는다. 21세기 혼성주체의 변화된 풍속도를 대변하듯, 아우라(Aura 혹은 권위)를 머금은 전통적인 도상들은 픽토그램(Pictogram)으로 연결된 루이비통(LOUIS VUITTON)과 슈프림(SUPREME)의 코드와 결합함으로써 밀레니엄 속 가상플랫폼에 등장하는 코스프레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작가는 고매한 전통미술이 갖는 순수성의 가치를 유머코드로 전환시킴과 동시에 ‘키치(Kitsch)’ 자체를 신자유주의 속 문화그룹 안에 위치시킨다.
아트놈을 보면 미술대학을 다닌 적이 없지만 풍자와 창의적 규칙을 만들며 사회의 논란거리를 예술로 승화시킨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이 떠오른다. 재밌고 창의적인 아트놈의 위트는 ‘나’보다는 ‘우리’, ‘꿈’보다는 ‘현실’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제지하지 못할 장난스런 행보들은 가벼운 현상 자체를 직관적으로 드러내기에 더욱 깊이가 있다. 부분보다는 전체를 먼저 본다는 그는 타고난 천재기질을 가졌다. 남들이 봤을 때 지나칠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가 하면, 신화화된 캐릭터나 슈프림의 패턴들을 텍스트와 결합하는 이질적인 실험들을 감행한다. 아트놈에게 아트란 세상과 가장 재밌게 대화하는 방식이자 온전한 자신으로 살게 해주는 행복한 매개체인 것이다. 오늘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선 아트놈의 행보는 작품이 만들어진 오늘의 흔적이 아닐까.
“나는 세상으로부터 한 발 짝 떨어져 있는 현실을 기록한다. 오늘을 외면하는 예술가는 천재소리는 들을지언정 오래갈 수 있는 동력은 탑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위트 있는 유머로 세상과 자신을 균형감 있게 직시하고 싶다.” - 아트놈 인터뷰 중에서
이상협, moon, 37x37x37cm, silver, 2021
이상협, new icicle, 20x20x20cm, silver, 2022
나는 기(器)’라는 절제된 형태 안에 한국적인 조형미라는 문화적 코드를 담아내고 있다. 작품 표면에 녹아 내리는 듯한 유연한 선과 작은 흔적들로 장식된 질감은 한국적인 문화 코드의 기형 위에 새로운 변화를 담으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나는 형태와 표면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각한다. 나의 작품에서 형태는 표면을 낳고, 표면은 다시 형태로 이어진다. 나에게 작품의 형태는 문화나 다름없고, 표면은 세대와 같다. 표면이 바뀌고 변화하면서 형태가 만들어지듯, 세대가 바뀌면서 문화가 달라지는 양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에서 표면의 질감이 미세하게 모두 다른 까닭은 이와 같은 철학이 투영된 결과이다.
망치질이라는 기본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금속이라는 물성이 반하여 한계에 도전하는 제작과정이 나의 작품세계의 중요한 축이다. 나는 우리나라 전통 도자의 기형을 금속으로 재현하면서, ‘기(器)’라는 절제된 형태 안에 한국적인 조형미라는 문화적 코드를 담아내고자 한다. 작품표면에 녹아 흘러내리는 듯 유연한 선과 작은 흔적들로 장식된 질감은 한국적인 문화코드의 기형 위에 새로운 변화를 담고자함이다. 작가로서 지속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가장 중점을 둔다. 이 말은 여러 방향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현재의 작업과 완성된 결과물이 다음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와 힘이 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작가 이상협
Installation view of Lee yong soon's Moon jar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개인의 사소한 물건에서 생활의 큰 부분까지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며 자신과 주변 세계를 창조하고 구축해 왔다. 인간에게 만드는 손은 노동을 의미함과 동시에 지적사고의 발현이며, 우리 자신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주는 구체적 행위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개인의 삶에 만드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즘 시대는 그야말로 기계와 거대 산업에 의한 공급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생산의 효율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적당히 쓸모 있는 물건들이 대량으로 공급되는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서 창작과 자급의 기회를 빼앗고, 삶의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마저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물건을 잘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솜씨가 좋아야 한다. 솜씨 좋은 손은 비범한 소질과 재주뿐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반복을 거듭한 경험의 축적에 의해 만들어진다. 경험의 축적은 일을 하는데 필요한 전문적인 지혜와 기술을 익게 하고, 제작자의 고상한 취미는 기교를 가지게 하여 물건을 아름답게 만든다. 또한 일에 대해 성실하고 근면한 자세를 지닌 사람이 좋은 물건을 탄생시킨다. 노력의 결실로 태어난 좋은 물건은 제작자에게 기쁨과 보람을 느끼게 하고 일을 지속할 수 있는 동기와 애정을 부여한다. 이러한 동기와 애정을 토대로 만드는 일을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사명감으로 수행하는 사람, 특별히 장인이라고 부른다. 수작에 참여한 이용순은 백자 달항아리를 만드는 데 있어 뛰어난 솜씨를 지닌 우리시대의 장인이다. 이들이 만들고 있는 물건들은 원래 실생활에 쓰이던 아주 사소한 물건으로 출발했으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들의 인생을 관통하는 높은 경지의 것으로 탄생하였다. 갤러리를 들어서면 다양한 크기의 백자 달항아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크고 둥근 선, 백설같이 하얗게 빛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항아리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질박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모습 그 자체로 자연임을 깨닫게 한다. 이용순은 고미술품 복원업에 종사해오다 백자에 매료되어 백자의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처음에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으나 옛 백자의 색상과 모양뿐만 아니라 느낌까지 고스란히 재현하려다 보니 생기는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소지(흙)와 유약의 테스트뿐만 아니라 기벽의 두께, 전과 굽의 넓이와 높이, 기울기 등 형태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백의 태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직접 산에서 흙을 채취하고 불순물을 일일이 걸러내는 작업(수비)등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달 항아리는 백자 소지의 물성적 한계로 두 개의 큰 대접 형태를 아래위로 접합시켜 만드는데,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이므로 반듯한 모양을 이루는 것도 있지만 만드는 이의 손길에 따라 접합 부분의 이음선이 보이거나 어느 한 쪽이 살짝 기울어지는 것도 있다. 이용순의 백자 달항아리는 의도하지 않은 부정형의 무심한 듯 자연스러운 조형미와 그만의 여유로움을 잘 담아내고 있다.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큐레이터 조지혜
이이남, 달항아리 풍경, 90.5x152x15cm, 65inch LED TV, single-channel video, color, sound, Running time 19min 43sec, 2009
이이남, DNA 달항아리, 120x120cm, Printing on titanium mirror, Edition of 6, 2022
고전회화와 인연을 맺어온 그간 작업을 통해 고전회화가 나에게 갖는 의미가 어떠한지 주목하였다. 전남 담양에서 출생하여 성장하기까지 자연스럽게 접한 남도의 풍경과 회화(남종화)들이 감각적 세포에 스며들어 본능적으로 고전회화를 택했으리라 본다. 이러한 인연관계들을 되짚으며 대상을 풍경(Landscape)라 부르는 서구적 관점보다 ‘산수(山水)’라 칭하는 동양의 정신을 추구하여, 대상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로 자아를 성찰하고자 한다. 작가는 팬데믹 속에서 이성중심의 모더니즘에 한계를 경험하며 대상과 주체를 객관화하는 서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대상과 주체가 공존하는 동양적 관점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작가 이이남
이종기, 달항아리1,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이종기, 달항아리2,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이종기, 달항아리3,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달항아리에 대한 담론은 시공간에 따라 끊임없는 해석의 변화가 있게 된다.
신화와 자연, 당대의 기술과 예술관을 품고 있는 역사적 사물인 도자기는 일상보다 더 집약된 소우주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미니멀과 간결함의 극치인 달항아리에 대한 담론은 달항아리를 보며 우리의 정신을 보는 것이고 결국 자신에 대한 성찰과, 물질보다는 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달항아리는 정신을 담고 있는 머리, 열정을 담고 있는 가슴, 무엇보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림 그 자체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달항아리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이유이다. 또 하나의 축은 도자기 밖의 세계, 그러나 도자기만큼이나 오래되고, 그래서 사실과 환상이 반반씩 섞여 그 경계가 도자기처럼 깨지기 쉬운 그런 세계이다. 이 낯선 우주의 장면 안에 전통과 현대, 그리고 예술과 대중문화의 대화가 존립하고 있다.
백자 항아리에 달항아리라는 이름을 붙였던 수화 김환기는 달항아리에서 우주를 보았다. 김환기의 우주 속에는 김환기가 보았던 달항아리가 있으나, 늘 영감과 아이디어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온 이종기는 달항아리에 달을 그린 유일한 작가이다. 그는 달항아리라는 우주로 달을 보냈고, 진짜 달을 투사하며 ‘달항아리의 달’이라는 언어적 유희를 즐긴다. 그리고 이종기의 인챈티드 화이트 시리즈의 흰색은 달항아리의 색이 되었다.
달항아리라는 우주에 투사된 것은 달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달항아리를 유영하고 있는 슈퍼맨을 본다. 이종기는 세계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의 변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작품에 한국의 문화적, 예술적 정체성을 담아왔다. 전통이 지닌 가능성과 가치를 믿는 그의 작품에서 슈퍼맨이라는 서양의 물질에 달항아리라는 하나의 오브제를 통해 동양의 정신이 들어가는 정신적 콜라주(collage)의 형성과 달항아리와 전통의 아름다움에 뿌리를 내리는 새로운 우리 자아의 구현을 보게 된다.
누구보다 동양의 정신을 나타내고자 했던 백남준의 <TV 부처>, <Video 부처>(쾰른 현대 미술관 퍼포먼스)에서는 자신의 이미지를 투영한 TV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하고 실시간으로 재생산한다. 참선하는 부처의 모습을 빌어 자화상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이종기의 패러디 작품을 보면 내가 나를 봄인데 부처로서 달을 바라봄이다. 아직 나의 자아로 확립되지 않은 타자의 이미지로서 바라보며 스스로의 모습을 자아의 재확인으로써 보는 것이다. 거울에 반영되는 자신의 이미지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아가 인식하는 자아의 모습이지만 타인이 투영되는 이미지는 자신의 모습과 익숙하지 않은 타자와 같은 다른 모습과 인상이다. 자아의 입장에서 분열되어 나온 하나의 타자이며 피드백으로 돌아오는 작품 자체가 바로 인간화된 예술로 해석된다. 작품 속을 자세히 보면 가부좌를 하고 달을 바라보는 부처의 등에 백남준 싸인이 보인다.
이종기의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관람객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며,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미적체험이 가능하다. 다양한 미디어를 매개로 몰입 하고 사유하는 현대인은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가상의 세계에 진입할 것이다. 철학적 사유와 예술작품은 때로 복잡한 현대사회의 문화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늠자로서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이종기
정현숙, Before and After, 50x50cm, Oil, crystal and Mother of Pearl on Canvas, 2022
정현숙, Before and After, 60x60cm, Oil, crystal and Mother of Pearl on Canvas, 2022
정현숙, Before and After, 70x70cm, Oil and Mother of Pearl on Canvas, 2022
우리의 전통양식 중에 나전칠기는 용도와 수요가 사라져가고 있다. 그 중에 우리에게 익숙한 자개는 가구의 장식 재료로 이용해왔으며 공예적인 요소로만 생각해왔다.
자개를 오브제로 사용하여 현대적 조형으로 재해석 하고자하는 작업이다. 여러 칼라를 입힌 자개를 넓이 1mm 안 밖으로 얇게 잘라 규칙적이거나 혹은, 불규칙적인 도형을 만들고 그로인해 만들어진 작은 공간에 스와로브스키 등 크리스탈을 부착하여 비구상적이며 장식적인 화면으로 보이게 했다. 그로 인한 반복성, 캔버스 밑색의 컬러와 자개컬러의 조화, 그리고 자개와 크리스탈로 인해 발생하는 빛을 표현한다. 구상작업으로는 조선시대의 달항아리와 초충도의 나비 등도, 도입하고 있다. 자개의 두께나 컬러도 다양하게 이용하며 자개의 뒷면에 색을 칠해 다양한 색의 자개를 만들어 작업하고 있다. 前(Before)과 後(after)라는 명제가 보여주듯이 과거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우리 앞에 되살아나는 시간성에 중점을 두었다.
‘달은 옛 달이로되,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 라는 당나라 시인인 두보의 시를 생각해본다.
전통적 재료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만 머물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역사에 빛을 더해본다.
정현숙
해피하트 in 달항아리, 72.7x60.6cm, Spray paint on canvas, 2022
달항아리, 72.7x60.6cm, Spray paint on canvas, 2022
대학시절 그래피티에 많은 영감을 받고 2년간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다 졸업 후 호주, 캐나다 등을 여행하며, 원주민과 인디언 미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에게 기쁨, 희망,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항상 예술이 무엇이고, 내가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즐겁게 작업을 하고 있다. 나에게 작업이란 나와 타인 그리고 이 세상을 알아가는 행위이자 즐거움이다. 작업 안에서 내 자신을 벗어버리고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다. 예술은 인간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며, 상상력을 만들어 주고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해피하트
하트 캐릭터는 내 자신을 대변한다.
항상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둘러보고 살피며, 연약하고 때론 두려운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긍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간다.
나도 한때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을 경험한 적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의 힘으로 극복이 된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해피하트'들이 바이러스처럼 움직이며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간다.
모든 이들이 '해피하트' 이미지를 통해 행복한 에너지를 받아 웃음이 지어질 수 있길 소망한다.
찰스장
karma 20225-53, 120x110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karma 20225-49, 100x92cm, Mixed media on canvas, 2022
기억의 이미지
나의 그림은 기억의 이미지화, 소통의 매개체다 .
기억은 특정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미지를 통해 기억은 표출된다.
'지각과 경험의 울타리'(기억)에 근거해 어떤 의도가 시도되고 감정이 표출되고 소재나 재료, 색감이 선택되고 이것은 어떤 이미지를 만들게
된다.
결국 내가 표현한 이미지는 내 삶의 기억, 내 삶의 이야기들이다.
나는 내 그림속에 내 삶의 이야기들을 펼쳐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그림을 보는 다른 이들은 내 그림속에서 본인의 이야기와 기억을 끄집어 낼 것이다. 나의 기억이라는 것이 다른 이의 기억과 연결
되며 그 관계에서 보편적 인간의 모습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내 삶'이라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게 되니 결국 보편적 인간을 표현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작품을 보는 것은 나의 내부로 잠행해 들어가는 동시에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 자신의 속으로들어가 보는 것이 된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나를 찾는 과정이다
'나'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닫게 되고 그 과정에서 '소통'이 이루어진다.
나의 그림은 결국 그 '소통'을 위한 매개체다.
소통은 단순한 현재의 언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 나와 너를 잇는 소통의 매개체가 바로 내가 표현한 기억의 이미지들이다.
내 그림에 보이는 달 항아리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다.
나는 달항아리라는 이미지를 소통의 매개체로 선택했다.
달항아리와 조용히 만나본 적이 있는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지만 극도로 세련된 그 피조물을 먹먹히 보고 있노라면 그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내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것인가를 그는 이미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달항아리 그리는 작가로 안다
하지만 나는 달항아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달항아리처럼 살고 싶은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 안에 내 삶의 이야기를 풀었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았고 찾았다.
내가 그린 ‘karma는 선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
그 선은 도자기의 빙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길이다.
갈라지면서 이어지듯 만났다 헤어지고 비슷한 듯하며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하나로 아우러진다.
우리의 의지를 초월하는 어떤 운명안에 삶의 질곡과 애환, 웃음과 울음, 그리고 결국엔 그런 것들을 다 아우르는 어떤 기운...
꾸밈없고 단순한 형태와 색감은 우리 마음 밑바닥의 측은지심 같다.
우리는 본디 착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나
이렇듯 도자기는 내 삶의 기억들의 이미지고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달항아리는 말이다.
내가 그 안에 기억을 넣어주면서 그것은 단순한 도자기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이 되었다.
여러 선과 흔적은 시공을 초월한 암호이고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 그 암호를 풀어나간다.
나의 그림을 바라보며 한 기억을 떠올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라
그 속에 착한 인간의 존재가 있다.
그 안에서 삶의 이야기를 찾는 여정을 시작해보기 바란다.
그 안에서 우린 만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삶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최영욱
하태임, 달항아리, 100x100cm, Acrylic on canvas, 2022
달항아리
순백색의 달항아리는 담백하고 넉넉한 조형미로 오랜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나에게 백색은 순수하고 담담한, 수용하고 밖의 것을 끌어안는 색이다. 동시에 시작의 색이기도 하다.
내가 그린 달항아리는 캔바스 공간에서 약간 비껴나가 있다.
캔바스 틀에 걸쳐져 구성되었는데 이는 확장되어지는 원의 형태를 사각 프레임에 담기엔 답답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토끼와 월계수가 살고 있다는 보름달을 올려다 보며 우리의 꿈과 소원을 떠올려 본 경험이 있듯이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달항아리에 반짝반짝 빛나는 오색 꿈조각을 투영시켜 보고 싶었다.
하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