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흥배, Impression, 100x50cm, Acrylic on canvas, 2021
"To see, To be seen"
OH HEUNG BAE
다시, 바니타스와 메멘토모리를 생각하다
skin. bodyscape. abstractscape. to see, to be seen. 작가 오흥배가 그동안 자신의 그림에 붙인 주제들이다. 주제만 놓고 보면 신체에 대한, 추상성의 문제에 대한, 그리고 시지각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동안 작가의 작업과 의식을 지배해왔다고 보아 무방하겠다. 그런 만큼 주제를 근거로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첩경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작가는 신체에 주목했다. 어떤 신체를 왜, 어떻게 그릴 것인가. 그 과정에서 다소간 막연하기도 난감하기도 했을 것이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신체는 전혀 객관적이지가 않다. 신체는 욕망의 대상이면서 패티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관음증 곧 훔쳐보기의 대상이면서 가학과 피학의 대상이기도 하다. 심리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이고 성적인 대상인가 하면, 억압과 해방과 관련해서는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기념하는)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대상인가 하면, 제도가 개별주체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권력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신체가 위치할 수 있는 지점은 무수하고, 그런 만큼 도대체 신체를 위한 객관적인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신체의 의미론적인 자리란 아마도 이 모든 지점들의 총합일 것이다. 그런다고 신체의 지정학적 위치가 정립되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작가는 아마도 신체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신체의 객관적인 지표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맥락 때문일 것이다. 어떤 맥락에 속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신체의 의미는 무작정 확장된다. 여기에 어떤 맥락 속에서 신체를 볼 때, 맥락에서 분리된 채 신체 자체를 볼 때, 부분 이미지를 확대하는 식으로 신체를 클로즈업해서 볼 때가 다 틀린다. 결국 신체가 추상적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사실은 시지각 문제 그러므로 의식의 문제에 연동된다. 어떤 맥락에서 보는지,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 어떤 시각에서 보는지에 따라서 신체의 의미는 매번 달라진다. 그러므로 다시, 신체를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곧 의식의 문제이고 시지각의 문제이다.
비단 신체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연히 신체로부터 그림을 시작했지만, 이후 클로즈업된 신체로부터 시든 꽃, 마른 꽃, 그러므로 어쩌면 죽은 꽃으로 소재를 옮겨간 이후에도 그 문제(문제의식 혹은 주제 의식)는 여전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물 대상 그대로의 핍진성이 여실한 그리기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소재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고, 바로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객관적인 사물 대상을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시지각과 관점의 차이에 연유한 것이고, 그런 만큼 관점 여하에 따라서 똑같은(객관적인?) 사물 대상도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작가에게서 그 다른 관점이란 뭔지, 그리고 그 다른 관점이 어떤 의미와 의의를 담보하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작에서의 신체든 근작에서의 꽃이든 사물 대상에 대한 작가의 관점에는 남다른 데가 있다. 주로 부분 이미지를 클로즈업해 그린 신체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마치 정면을 응시하는 또 다른 눈 같은 젖꼭지, 알 수 없는 구멍처럼도 보이는 오므린 손, 그리고 여기에 하이힐을 신은 발뒤꿈치의 각질과 웅크린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들이다.
도대체 이 그림들은 다 뭔가. 아마도 다르게 보기며 낯설게 하기를 겨냥하고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체는 친근한, 알만한, 안 봐도 비디오인 소재라고 생각하지만, 관점의 각도를 살짝 트는 것만으로도 졸지에 낯설고 이질적인 소재로 돌변한다. 친근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친근한 그러므로 정상적인 신체가 은폐하고 있던 것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것들이 드러나 보이면서 낯설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분별한 욕망과 같은(구멍을 연상시키는 오므린 손에서 보는 바와 같은). 욕망의 덧없음과 같은(하이힐과 각질의 급격한 결합에서 보는 것과 같은). 여기에 뒷모습이 연민을 자아내고(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모든 뒷모습은 타자에 해당하고 타자를 드러낸다), 또 다른 눈처럼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젖꼭지가 신체가 은폐하고 있는, 그러므로 억압된 욕망의 감시자(초자아?) 역할을 대리하고 있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To see, to be seen, 112.1x145,5cm, Oil on canvas, 2017
To see, to be seen, 116.8x72.7cm, Oil on canvas, 2017
To see, to be seen, 116.8x91cm, Oil on canvas, 2018
근작에서의 꽃 그림 역시 평범하지는 않다. 작가는 왜 꽃다운 꽃을, 꽃이 가장 화려했을 시절을 마다하고 시든 꽃, 마른 꽃, 그러므로 어쩌면 죽은 꽃을 그렸을까. 유별난 취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신체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처럼 작가는 죽은 꽃을 통해 꽃의 본질을 본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꽃을 통해서는 꽃의 본질을 볼 수가 없는가. 그런데, 도대체 꽃의 본질이란 뭔가. 상식적으로 꽃의 본질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답기 때문에 꽃이다.
여기서 대개 상식은 의심스럽다. 롤랑 바르트는 상식을 독사(doxa), 그러므로 부르주아의 생활관습이며 언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아름다움에 대한 정전으로 알려진 플라톤의 전언을 소환해보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관념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 자체를, 아름다움의 관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관념이고,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관념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다만 그런 연유 곧 관념을 반영하는 이유로 해서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따름이다. 결국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Impression, 116.8x80.3cm, Acrylic on canvas, 2021
그렇게 해묵은 플라톤의 관념론이 상식을 깬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관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아마도 죽은 꽃의 기억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죽은 꽃은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 기억 속에 혹 아름다움의 관념이 오롯이 보존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죽음, 그러므로 감각적 아름다움이 끝장난 지점에서 비로소 삶, 그러므로 관념적 아름다움이 개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여기서 기억은 시간에 연동된다. 죽은 꽃에는 살아있는 꽃의 시간이 보존돼 있는데, 그것을 꽃의 기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 자체라기보다는 꽃의 기억 그러므로 죽은 꽃이 상기시키는 아름다움, 되돌려진 시간 속에서 다만 상기 그러므로 관념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바니타스와 메멘토모리. 인생무상과 죽음의 환기. 서양미술사 그러므로 어쩌면 서양문명사에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전언이고 알레고리다. 바로크미술에서 만개했던 그 전언, 그 알레고리는 어쩌면 감각은 관념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감각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다시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은 덧없다는 플라톤의 전언을 계승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낭만주의에서 죽음의 화신은 되돌아오는데, 삶을 정화하는 죽음, 에로스를 정화하는 타나토스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플라톤이라면 감각을 정화하는 관념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플라톤은 초감각의 시대로도 되돌아온다. 죽은 꽃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작가의 그림은 초감각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런, 초감각적인 작가의 그림에로도 되돌아온다. 초감각적인? 감각을 넘어선? 그러므로 어쩌면 관념적인? 감각을 통해 되려 관념을 불러들인? 그리고 그렇게 감각이 관념으로 뒤집힌 분명한 것은 작가의 죽은 꽃 그림이 죽음을 넘어 아름다움의 본질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며, 여기에 감각적으로도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체는 불쾌하지만 재현된 시체는 쾌감을 준다고 했는데, 아마도 비장미(그 자체 비극의 미적 성질에 해당할)를 의미할 것이고, 그 의미는 작가의 그림에 대해서도 유효할 것이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Impression, 116.8x80.3cm, Acrylic on canvas, 2021
Impression, 90.9x60.6cm, Acrylic on canvas, 2021
존재의 부재
존재는 존재의 부재에서 온다는 말이 부쩍 와닿는 요즘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이 무너지고 많은 변화를 경험하면서 부재(absence)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작품 안에서 내 마음속 이야기에 집중하게 했다.
일상적 대상의 “다시 보기”는 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최근 진행하는 “impression”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흔하고 작으며 언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어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배경 정도로 여겨지는 것들인데 나는 이런 것에서 내가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선물 받은 평범한 꽃다발은 행복했던 어떤 순간을 생각하게 하고, 길가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고 말라버린 강아지풀은 어린아이가 이뻐하던 그날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다 타버린 초, 한겨울 길가에 얼어 죽은 이름 모를 잡초, 수확이 끝난 밭에 덩그러니 서 있는 농작물, 깊은 산 나무 밑에서 힘들게 자라는 버섯 역시 그렇다. 이처럼 작품 속 등장하는 여러 대상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닌 인식의 재발견을 통해서 등장하게 되었고, 이런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극사실적 표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대상의 주관성을 차단 함으로써 조화와 관계에 집중할 수 있고, 각자가 생각하는 대상의 이상화된 모습으로 생각하게 유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Impression, 53x45.5cm, Oil on canvas, 2022
단순한 원색의 배경에 사실적으로 묘사된 대상은 어떨 땐 외롭게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당당해 보이기도 한다. 한 화면에서 여러 소제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서로를 무시하는 듯하다가 어떨 땐 원래부터 하나인 것처럼 이질적이지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런 방식은 관람자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익숙한 것이지만 발견된 익숙함처럼 보이게 하고 하나하나의 소제에서 느끼는 감정 혹은 더 나아가 전체의 알레고리를 생각해 보게 할 것이다.
오흥배
Impression,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21
Impression,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21
Absence of Existence
These days, the saying that existence comes from the absence of existence comes to mind. As my daily life, which I took for granted, collapsed and experienced many changes, I began to think more about the absence.
This thought, perhaps, naturally made me focus on the story in my heart when creating my artwork.
The ‘seeing again’ of everyday objects is the most important element in my work, and the recent ‘impression’ series is representative.
They are common, small, and can be easily seen anytime, anywhere, so they are overlooked or regarded as background without recognizing their existence, but there are times when I find something in these things that I cannot express in words or writing. For example, an ordinary bouquet received as a gift reminds me of a happy moment, the frozen and dried fox grass on the roadside due to the cold weather reminds me of the day when a child was happy with it.
Also, burnt out candles, unknown weeds frozen to death by the roadside in midwinter, crops standing alone in a harvested field, and so are the mushrooms that grow with difficulty under the deep mountain trees.
In this way, the various objects that appear in my work have appeared through the rediscovery of perception, not the image I had thought so far. As a way to express these thoughts, I use a hyper-realistic expression method, and paradoxically, by blocking the subjectivity of the object, the focus is on harmony and relationships. This is because I believe that the audience can lead them to think in the idealized form of the object they are thinking of.
Objects depicted realistically against a background of simple primary colors sometimes look lonely and sometimes look proud. Several subjects appear on the same screen, seemingly ignoring each other, and at other times, as if they were originally one, they are heterogeneous but balanced. In this way, the audience sees what he or she is looking at as something familiar that can be commonly seen around them, but it will make it look like a discovered familiarity and make them think about the emotions they feel in each subject or, furthermore, the allegory of the whole.
Oh Heung bae
Impression, 90.9x65.1cm, Acrylic on canvas, 2022
오흥배(吳興培) Oh Heungbae
2011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졸업
2006 협성대학교 미술학과 서양화 전공 졸업
개인전
2021 impression, 갤러리 두인, 서울
2020 to see, to be seen, 유중이트센터. 서울
2019 to see, to be seen, 인영갤러리. 서울
생명의 언어, 호반아트리움, 광명
2017 to see, to be seen, 갤러리 다함-안산
2016 to see, to be seen, 통인옥션갤러리-서울
2015 to see, to be seen, 희수갤러리-서울
to see, to be seen, ponetive space, 헤이리
2013 Abstract scape, 롯데갤러리 안양점, 경기도
2012 Abstract scape, 갤러리 아우라, 서울
2010 BODYSCAPE, 갤러리라메르, 서울
2009 BODYSCAPE, LEEART GALLERY, 대구
BODYSCAPE, 미술공간현, 서울
주요단체전
2023 All that Realism_한만영에서 윤위동까지 2부, 갤러리나우, 서울
2022 존재의 환유: 삶이라는 노마드, 오페라 갤러리, 서울
더 컬렉션, 더 현대 서울, 서울
2019 정물화의 유혹, 오승우미술관, 전라남도
2018 가송예술상 여름생색 전, 인사아트 갤러리. 서울
2016 살아있는 그림전, GS칼텍스 예울마루, 여수
2015 Art Taipei 2015, Trade Exhibition Hall, Taiwan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개관기념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수원
2011 서울미술대전, 극사실회화-눈을 속이다, 서울 시립미술관, 서울
외 다수
수상
2020 남도문화재단 청년작가공모전 대상
2018 가송예술상-콜라보레이션 부문
작품소장
신한화구, 서울 시립미술관, 가송재단, 태성문화재단, 남도문화재단, 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오흥배, Impression, 100x50cm, Acrylic on canvas, 2021
"To see, To be seen"
OH HEUNG BAE
다시, 바니타스와 메멘토모리를 생각하다
skin. bodyscape. abstractscape. to see, to be seen. 작가 오흥배가 그동안 자신의 그림에 붙인 주제들이다. 주제만 놓고 보면 신체에 대한, 추상성의 문제에 대한, 그리고 시지각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그동안 작가의 작업과 의식을 지배해왔다고 보아 무방하겠다. 그런 만큼 주제를 근거로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첩경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작가는 신체에 주목했다. 어떤 신체를 왜, 어떻게 그릴 것인가. 그 과정에서 다소간 막연하기도 난감하기도 했을 것이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신체는 전혀 객관적이지가 않다. 신체는 욕망의 대상이면서 패티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관음증 곧 훔쳐보기의 대상이면서 가학과 피학의 대상이기도 하다. 심리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이고 성적인 대상인가 하면, 억압과 해방과 관련해서는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기념하는)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대상인가 하면, 제도가 개별주체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권력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신체가 위치할 수 있는 지점은 무수하고, 그런 만큼 도대체 신체를 위한 객관적인 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 신체의 의미론적인 자리란 아마도 이 모든 지점들의 총합일 것이다. 그런다고 신체의 지정학적 위치가 정립되리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작가는 아마도 신체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신체의 객관적인 지표를 찾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맥락 때문일 것이다. 어떤 맥락에 속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신체의 의미는 무작정 확장된다. 여기에 어떤 맥락 속에서 신체를 볼 때, 맥락에서 분리된 채 신체 자체를 볼 때, 부분 이미지를 확대하는 식으로 신체를 클로즈업해서 볼 때가 다 틀린다. 결국 신체가 추상적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사실은 시지각 문제 그러므로 의식의 문제에 연동된다. 어떤 맥락에서 보는지,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 어떤 시각에서 보는지에 따라서 신체의 의미는 매번 달라진다. 그러므로 다시, 신체를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곧 의식의 문제이고 시지각의 문제이다.
비단 신체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연히 신체로부터 그림을 시작했지만, 이후 클로즈업된 신체로부터 시든 꽃, 마른 꽃, 그러므로 어쩌면 죽은 꽃으로 소재를 옮겨간 이후에도 그 문제(문제의식 혹은 주제 의식)는 여전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물 대상 그대로의 핍진성이 여실한 그리기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소재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고, 바로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객관적인 사물 대상을 추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시지각과 관점의 차이에 연유한 것이고, 그런 만큼 관점 여하에 따라서 똑같은(객관적인?) 사물 대상도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그렇다면 작가에게서 그 다른 관점이란 뭔지, 그리고 그 다른 관점이 어떤 의미와 의의를 담보하는지를 해명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전작에서의 신체든 근작에서의 꽃이든 사물 대상에 대한 작가의 관점에는 남다른 데가 있다. 주로 부분 이미지를 클로즈업해 그린 신체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마치 정면을 응시하는 또 다른 눈 같은 젖꼭지, 알 수 없는 구멍처럼도 보이는 오므린 손, 그리고 여기에 하이힐을 신은 발뒤꿈치의 각질과 웅크린 사람의 뒷모습을 그린 그림들이다.
도대체 이 그림들은 다 뭔가. 아마도 다르게 보기며 낯설게 하기를 겨냥하고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신체는 친근한, 알만한, 안 봐도 비디오인 소재라고 생각하지만, 관점의 각도를 살짝 트는 것만으로도 졸지에 낯설고 이질적인 소재로 돌변한다. 친근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친근한 그러므로 정상적인 신체가 은폐하고 있던 것들, 그러므로 비정상적인 것들이 드러나 보이면서 낯설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분별한 욕망과 같은(구멍을 연상시키는 오므린 손에서 보는 바와 같은). 욕망의 덧없음과 같은(하이힐과 각질의 급격한 결합에서 보는 것과 같은). 여기에 뒷모습이 연민을 자아내고(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모든 뒷모습은 타자에 해당하고 타자를 드러낸다), 또 다른 눈처럼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젖꼭지가 신체가 은폐하고 있는, 그러므로 억압된 욕망의 감시자(초자아?) 역할을 대리하고 있다면 지나친 상상력의 비약이라고 할까.
To see, to be seen, 112.1x145,5cm, Oil on canvas, 2017
To see, to be seen, 116.8x72.7cm, Oil on canvas, 2017
To see, to be seen, 116.8x91cm, Oil on canvas, 2018
근작에서의 꽃 그림 역시 평범하지는 않다. 작가는 왜 꽃다운 꽃을, 꽃이 가장 화려했을 시절을 마다하고 시든 꽃, 마른 꽃, 그러므로 어쩌면 죽은 꽃을 그렸을까. 유별난 취향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쩌면 신체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처럼 작가는 죽은 꽃을 통해 꽃의 본질을 본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꽃을 통해서는 꽃의 본질을 볼 수가 없는가. 그런데, 도대체 꽃의 본질이란 뭔가. 상식적으로 꽃의 본질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답기 때문에 꽃이다.
여기서 대개 상식은 의심스럽다. 롤랑 바르트는 상식을 독사(doxa), 그러므로 부르주아의 생활관습이며 언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아름다움에 대한 정전으로 알려진 플라톤의 전언을 소환해보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은 관념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움 자체를, 아름다움의 관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관념이고,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관념의 반영에 지나지 않으며, 다만 그런 연유 곧 관념을 반영하는 이유로 해서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따름이다. 결국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것,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Impression, 116.8x80.3cm, Acrylic on canvas, 2021
그렇게 해묵은 플라톤의 관념론이 상식을 깬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 자체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관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작가는 아마도 죽은 꽃의 기억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죽은 꽃은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그 기억 속에 혹 아름다움의 관념이 오롯이 보존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죽음, 그러므로 감각적 아름다움이 끝장난 지점에서 비로소 삶, 그러므로 관념적 아름다움이 개화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여기서 기억은 시간에 연동된다. 죽은 꽃에는 살아있는 꽃의 시간이 보존돼 있는데, 그것을 꽃의 기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 자체라기보다는 꽃의 기억 그러므로 죽은 꽃이 상기시키는 아름다움, 되돌려진 시간 속에서 다만 상기 그러므로 관념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바니타스와 메멘토모리. 인생무상과 죽음의 환기. 서양미술사 그러므로 어쩌면 서양문명사에 그림자처럼 어른거리는 전언이고 알레고리다. 바로크미술에서 만개했던 그 전언, 그 알레고리는 어쩌면 감각은 관념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감각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다시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은 덧없다는 플라톤의 전언을 계승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낭만주의에서 죽음의 화신은 되돌아오는데, 삶을 정화하는 죽음, 에로스를 정화하는 타나토스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플라톤이라면 감각을 정화하는 관념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플라톤은 초감각의 시대로도 되돌아온다. 죽은 꽃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작가의 그림은 초감각적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런, 초감각적인 작가의 그림에로도 되돌아온다. 초감각적인? 감각을 넘어선? 그러므로 어쩌면 관념적인? 감각을 통해 되려 관념을 불러들인? 그리고 그렇게 감각이 관념으로 뒤집힌 분명한 것은 작가의 죽은 꽃 그림이 죽음을 넘어 아름다움의 본질을 상기시킨다는 점이며, 여기에 감각적으로도 아름답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체는 불쾌하지만 재현된 시체는 쾌감을 준다고 했는데, 아마도 비장미(그 자체 비극의 미적 성질에 해당할)를 의미할 것이고, 그 의미는 작가의 그림에 대해서도 유효할 것이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Impression, 116.8x80.3cm, Acrylic on canvas, 2021
Impression, 90.9x60.6cm, Acrylic on canvas, 2021
존재의 부재
존재는 존재의 부재에서 온다는 말이 부쩍 와닿는 요즘이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이 무너지고 많은 변화를 경험하면서 부재(absence)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작품 안에서 내 마음속 이야기에 집중하게 했다.
일상적 대상의 “다시 보기”는 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최근 진행하는 “impression”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흔하고 작으며 언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어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배경 정도로 여겨지는 것들인데 나는 이런 것에서 내가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선물 받은 평범한 꽃다발은 행복했던 어떤 순간을 생각하게 하고, 길가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고 말라버린 강아지풀은 어린아이가 이뻐하던 그날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다 타버린 초, 한겨울 길가에 얼어 죽은 이름 모를 잡초, 수확이 끝난 밭에 덩그러니 서 있는 농작물, 깊은 산 나무 밑에서 힘들게 자라는 버섯 역시 그렇다. 이처럼 작품 속 등장하는 여러 대상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닌 인식의 재발견을 통해서 등장하게 되었고, 이런 생각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극사실적 표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대상의 주관성을 차단 함으로써 조화와 관계에 집중할 수 있고, 각자가 생각하는 대상의 이상화된 모습으로 생각하게 유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Impression, 53x45.5cm, Oil on canvas, 2022
단순한 원색의 배경에 사실적으로 묘사된 대상은 어떨 땐 외롭게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땐 당당해 보이기도 한다. 한 화면에서 여러 소제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서로를 무시하는 듯하다가 어떨 땐 원래부터 하나인 것처럼 이질적이지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런 방식은 관람자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익숙한 것이지만 발견된 익숙함처럼 보이게 하고 하나하나의 소제에서 느끼는 감정 혹은 더 나아가 전체의 알레고리를 생각해 보게 할 것이다.
오흥배
Impression,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21
Impression, 53x45.5cm, Acrylic on canvas, 2021
Absence of Existence
These days, the saying that existence comes from the absence of existence comes to mind. As my daily life, which I took for granted, collapsed and experienced many changes, I began to think more about the absence.
This thought, perhaps, naturally made me focus on the story in my heart when creating my artwork.
The ‘seeing again’ of everyday objects is the most important element in my work, and the recent ‘impression’ series is representative.
They are common, small, and can be easily seen anytime, anywhere, so they are overlooked or regarded as background without recognizing their existence, but there are times when I find something in these things that I cannot express in words or writing. For example, an ordinary bouquet received as a gift reminds me of a happy moment, the frozen and dried fox grass on the roadside due to the cold weather reminds me of the day when a child was happy with it.
Also, burnt out candles, unknown weeds frozen to death by the roadside in midwinter, crops standing alone in a harvested field, and so are the mushrooms that grow with difficulty under the deep mountain trees.
In this way, the various objects that appear in my work have appeared through the rediscovery of perception, not the image I had thought so far. As a way to express these thoughts, I use a hyper-realistic expression method, and paradoxically, by blocking the subjectivity of the object, the focus is on harmony and relationships. This is because I believe that the audience can lead them to think in the idealized form of the object they are thinking of.
Objects depicted realistically against a background of simple primary colors sometimes look lonely and sometimes look proud. Several subjects appear on the same screen, seemingly ignoring each other, and at other times, as if they were originally one, they are heterogeneous but balanced. In this way, the audience sees what he or she is looking at as something familiar that can be commonly seen around them, but it will make it look like a discovered familiarity and make them think about the emotions they feel in each subject or, furthermore, the allegory of the whole.
Oh Heung bae
Impression, 90.9x65.1cm, Acrylic on canvas, 2022
오흥배(吳興培) Oh Heungbae
2011 중앙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전공 졸업
2006 협성대학교 미술학과 서양화 전공 졸업
개인전
2021 impression, 갤러리 두인, 서울
2020 to see, to be seen, 유중이트센터. 서울
2019 to see, to be seen, 인영갤러리. 서울
생명의 언어, 호반아트리움, 광명
2017 to see, to be seen, 갤러리 다함-안산
2016 to see, to be seen, 통인옥션갤러리-서울
2015 to see, to be seen, 희수갤러리-서울
to see, to be seen, ponetive space, 헤이리
2013 Abstract scape, 롯데갤러리 안양점, 경기도
2012 Abstract scape, 갤러리 아우라, 서울
2010 BODYSCAPE, 갤러리라메르, 서울
2009 BODYSCAPE, LEEART GALLERY, 대구
BODYSCAPE, 미술공간현, 서울
주요단체전
2023 All that Realism_한만영에서 윤위동까지 2부, 갤러리나우, 서울
2022 존재의 환유: 삶이라는 노마드, 오페라 갤러리, 서울
더 컬렉션, 더 현대 서울, 서울
2019 정물화의 유혹, 오승우미술관, 전라남도
2018 가송예술상 여름생색 전, 인사아트 갤러리. 서울
2016 살아있는 그림전, GS칼텍스 예울마루, 여수
2015 Art Taipei 2015, Trade Exhibition Hall, Taiwan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개관기념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수원
2011 서울미술대전, 극사실회화-눈을 속이다, 서울 시립미술관, 서울
외 다수
수상
2020 남도문화재단 청년작가공모전 대상
2018 가송예술상-콜라보레이션 부문
작품소장
신한화구, 서울 시립미술관, 가송재단, 태성문화재단, 남도문화재단, 현대미술관 미술은행